만약 그때 그러지 않았다면…

엘리자벳 김 | 좋은나무숲

우리는 살아가면서 종종 지난 일을 되돌아 보면서 만약 그때 그랬더라면 혹은 그러지 않았다라면 하는 경우가 많다. 가령 그때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라면, 혹은 전철을 타지 않았더라면, 혹은 만약 그 자리에 없었더라면 하는 이야기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인생은 우연 속에 일어나는 일들이 많다는데 그 우연 또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우연을 가장한 필연인지도 모른다. 운전을 하는 도중에 라디오를 트니 까마득히 기억 저편에 있던 Please Release me 란 노래가 흘러나왔다. 나 역시 이 음악만 아니었다면, 아니면 그날 비만 내리지 않았다면 이라는 신파조의 이야기 속에 내 인생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 지금까지 온 것일 것이다.

그것이 필연이었을까? 아니면 흘러가는 물을 억지로 역류시킨 것이었을까?

스코트 매켄지는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머리에 꽃을 꽂으세요(San Francisco -Be sure to wear some flowers in your hair)라고 노래를 불렀지만, 그날 내 머리에는 배반의 장미를 꽂고 있었을까?

아주 아주 오래된 시간 속에 5월이 끝나가는 비 내리는 날이었다.

당시 나는 버클리 시티의 한 작은 대학의 유학생이었고 공부만 끝나면 서울로 돌아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미국에 온 후 다시 한국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일 년의 시간 동안 나는 샌프란시스코의 음습한 기온과, 골든 게이트 밑으로 밀려오는 안개와 만(Bay)을 따라 바닷물이 넘실대고 케이블카 종소리가 댕댕거리는 곳, 이곳에 빠져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10분만 걸어가면 바다가 보이는 시내 한복판의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고 가끔 우울할 때면 재팬타운에 있는 작은 피아노 바에 자주 들렸다.

내가 들어가면 얼굴이 하얗고 긴 머리를 묶고 다니던 피아니스트는 다른 연주를 하다가도

당시 내가 좋아하던 노래를 연주해 주곤 했다. 그것은 잉글버트 험퍼딩크의 (Englebert Humperdink) Please Release me였다.

내게 있어 이 피아노 바는 영혼의 안식처처럼 힘들었던 시간을 잠시 편안하게 해 주는 곳이었다.

피아노 바는 샌프란시스코 Japan Town을 관통하는 Geary Blvd.에 자리 잡았지만 약간 골목으로 한 발자국 들어간 외진 곳에 있었다. 그곳엔 브라질리안 체리로 만든 무대가 있었고 검은 피아노 한 대와 그 옆으로 둥근 카운터 바가 있었다. 벽은 초콜릿 색으로 샌프란시스코 풍물이 그려져 있었는데 특히 케이블카에 매달린 사람들의 표정들이 가지각색이었다. 특별히 바(Bar) 웨이츄레스는 없고 나이가 약 40대 정도인 일본 여자 주인이 짙은 청색의 기모노를 입고 서빙을 하고 있었다.

내가 늘 앉던 자리는 입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 피아노가 약간 뒤로 보이는 마지막 테이블이었다. 내가 몇 달간 소식을 끊자 연락도 없이 서울에서 그가 나를 찾아왔다. 나는 방황을 하는 중이었고 그날로 방황을 끝내고 싶어 그와 함께 피아노 바에 마지막으로 들린 것이다.

우리를 보자 눈이 커져 버린 기모노를 입은 주인 여자와 짧게 눈을 맞추었다. 내 표정이 심상치 않아 보이자 그녀는 아무 소리 하지 않고 딸기를 갈아 만든 칵테일 마시겠냐며 눈짓을 보내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2개를 주문했고 자리에 앉자 K 역시 내 앞에 앉았다. 나는 시선을 잠시 돌려 벽에 붙어있는 케이블카 그려진 벽을 바라보았고 다시 눈물이 그렁그렁한 커다란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때 나를 본 피아노 맨은 건반을 두드리며 노래하고 있었다. ”Please release me let me go for I don’t love you anymore…제발 나를 놔줘요, 가게 해 주어요. 당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요. 나는 새로운 사랑을 찾았어요. 나를 놔주고 나로 하여금 새로운 사랑을 하게 해줘요,”, 음악은 흘러나왔고 감정이 격해져 버린 나는 그곳을 뛰쳐나왔다. 그 이후 단 한 번도 K를 만난 적이 없다. 그리고 완벽하게 K로부터 잠적해 버렸다.

샌프란시스코는 유달리 우울증 환자들이 많은 곳이라고 한다.

너무나 외로운 곳, 안개는 일 년 내내 끼고 저 멀리 골든 게이트 밑으로 밀려오는 습기 찬 바람은 한 여름에라도 뼛속까지 추위를 느끼게 하는 곳.

태평양을 건너면 내 나라 내 고향인데 낯선 곳에서 헤매는 자신이 싫어 바닷가에 가서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곳, 금문교 지나 높은 산 위에서 바라다보이는 샌프란시스코는 하얀 성채처럼 화려하지만, 그 속에는 게이들과 홈리스들과 마음 둘 곳 없는 사람들이 높은 빌딩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속에 흔들리고 있는 쓸쓸한 곳,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이 도시가 그때는 왜 그렇게 우울하게 느껴졌을까.

나는 너무 젊었던 것일까?

그렇게 수십 년의 시간이 흘렀다.

아!! 오늘 날씨가 너무 더운가 보다. 더위 먹고 수십 년 지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언제나 이 음악을 편안하게 듣는 날이 오려나 모르겠다. (elkimsociety@gmail.com. 06_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