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미션을 통한 음악의 길

김은경 | 바이올린 비올리스트 / Kawai Music School / Plano ISD faculty.


1987년 1월 1일 지금으로부터 33년 나는 대학교 1학년이었다.  새해 첫날을 엄마와 감동적인 영화로 시작을 했었다. The Mission이 감동적인 영화를 작곡한 엔니오 모리코네 올해 여름 7월 6일 91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영화와 음악의 길의 인연은 이날 서울 호암 아트홀에서 보고 유럽 대륙을 거쳐 미국 땅에서 어려운 팬데믹 세상에서 나의 심금과 세계인의 마음을 울린 영화 음악의 대부 모리코네의 죽음 소식을 들었다.

“ 1987년 첫날 너무나도 감동적인 영화로 시작을 했다.  The Mission. 나는 영화를 보고 다시 한번 하느님의 영광을 느꼈다. 종교의 신성함, 미드의 자서전을 읽고 원주민에 대한 매력을 느꼈는데 다시 한번 원주민들, 그들 자체의 생활 법칙, 순진함에 매력을 느꼈다. 정치인들의 욕망, 제수이트교 수사들의 희생정신과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 1750년대의 생활 풍습과 성직자나 사람들의 생활, 아는 없고 가진 없는 원주민들에게 선교하는 신부들에 대해서는 정말 나의 마음을 뜨겁게 했다. 30개 강이 보이는 거대한 폭포, 자연에 대한 나의 숭배, 나는 생각한다. 거대한 자연은 바로 하나님이라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추기경이 말 ‘ 신부와 과다니 족은 죽었지만 사실 죽은 것은 저이고 저들은 영원히 살아남을 것입니다.’  이 영화를 제작하기까지 제작진들의 끝없는 인내와 노력을 생각하고 다시 한번 예술의 위대함을 느낀다. 그리고 나도 자신의 인생을 설립하고 어떠한 일이라도 헤쳐나가며 사람의 인생을 완성 시켜야겠다고 생각한다. 이 희망찬 87년과 함께.

‘ The strong are lonely.’ ‘맹렬한 경쟁심이 무기다’ -수영 선수 미첼의 글-  “

위의 글은 아직도 가지고 있는 1987년 1월 1일 나의 일기장이다.  나와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와 인연을 맺은 지 6년이 되었을 때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로 인해 집안 경제가 어려웠던 나의 어린 시절은 비싼 악기 공부는 생각도 때였는데 우연찮은 기회로 성악으로 선화 학교를 콩쿠르 입상으로 장학금을 받고 들어간 나는 친구 바이올린을 빌려서 재미로 하다가 사실을 아신 엄마가 냉장고를 팔아서 옛날에 7만 원짜리 국산 바이올린을 사주셨다. 난 악기가 있는게 너무 행복하여 학교가 끝나고 집에 오면 때까지 계속했다. 중학교 2학년에 악기를 사자마자 나는 기악과로 전과 하였고 그저 순수한 음악이 좋아서 했는데, 음악의 길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래도 지금 생각 해보면, 그 당시는 내가 이것을 하나 싶은 마음에 고민과 방황을 많이 했지만, 따뜻한 집이 있었고 뒷바라지 해주는 어머니가 있었고, 좋은 시절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좋아서 시작한 음악이었지만 나는 항상 현실에서 많은 방황을 하던 시절, 바로 미션 영화는 나의 방황을 멈추게 계기가 되었다. 내가 이날 받은 미션 영화의 인상과 나의 마음가짐은 대학 생활에서의 정신적 방황과 심한 고뇌가 있을 나를 다시 일으키우는 정신적 힘이 되었고, 너무나도 힘들었던 9년간의 독일 유학 생활에서 나를 끝없이 일으켜 세우는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원하던 현실을 이루지 못할 때, 나는 미션 영화가 떠오르곤 했다.  그리고 진정한 음악의 길을 가는 길에는 마치 제수이트 수도사의 희생정신이 떠오르곤 했다.  음악의 길뿐이 아니라, 어떤 길을 가는데에도 희생 없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1988 한국에서 88 올림픽을 열기 전에 나는 독일 유학의 길을 택했다. 내가 한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는 민주화를 위한 데모가 한창때였다. 한때, 의대생들이 하얀 의복을 입고 끝없는 행렬을 하면 최루탄 가스가 음대 건물을 채운 적도 여러 번이었다. 음악 생각만 하고 살던 나는 대학을 가서 알게 한국의 정치 현실, 나는 음악을 그만두고 사회학에 깊은 관심을 두게 되었다.  이유는 인권 문제에 깊은 관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두 토끼를 잡을 수는 없었다. 음악을 그만두고 전공을 바꾸느냐, 아니면 음악을 위하여 평범한 인생을 버리고 나라 독일로 가느냐? 어머니의 도움으로 독일행을 택하게 되었다. 먼 나라로 가는 나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앞으로 다가올 가시밭길인 모르고.  

새로운 나라에서 긍정적 부정적 영향과 좋은 음악 환경과 현실의 어려움과 언어부터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던 유학 생활은 나에게 무서운 병을 일으켰다.  팔로 숟가락 하나 없을 정도로 손과 팔에 병이 것이다. 치료를 위해 한국에 잠시 돌아온 나는 의사로부터 다시는 바이올린을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어느 정도 치료를 짐을 싸러 독일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짐을 싸는 순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지금 여기서 바이올린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뭔가를 시도해 봐야 하나. 그리고 생각했다.  도대체 의사 선생님이 나에게 뭐고 무엇인지? 지금 내가 이름을 말하면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있는 아주 유명한 의사 시다. 내가 과연 의사의 말을 따라야 하는가?  그리고 짐을 들고 그냥 집으로 가야 하는가?  시차와 여러 가지 생각으로 한잠도 없었다. 그리고 미션 음악을 들었다. 그 순간 날아오는 총알 앞을 십자가를 들고 평화 시위로 앞으로 걸어가는 신부님을 떠올렸다. 그리고 죽음을 각오하고 뭔가를 하는 신부들을 생각하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바로 옆에 있는 처음 독일 의사에게 무조건 갔다. 그리고 사정을 얘기하고 치료를 시도하고 싶다고 얘기하였다.  의사가 유명 사람인지, 능력이 있는 사람인지 알지도 못했고 무조건 치료 시도하자고 했다. 영화에서 수도사를 모방하여 무조건 갔는데,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길을 준다는 말을 나는 입증 하였다. 난 독일에서 휴학 신청서를 내고 6개월을 오로지 치료와 나의 힘줄을 다시 제자리로 돌리는데 모든 24시간을 보내고 성공하였다. 이 독일 의사도 내게 거의 기적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치료 중일 하노버에서 윤이상 75주년 음악제가 있었다.  그리고 이분으로부터 다시 한번 미션 영화보다 강한 강렬함을 느꼈다.  아마도 새로운 미션이지 아닐까? 이 새로운 미션은 다음 스토리로 두겠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1987년에 미션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아마 부상으로 짐을 챙기고 한국으로 돌아가도 다른 길을 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요즘 팬데믹 세상으로 너무나 많은 사람이 죽음과 고통과 괴로움을 겪고 있다.  그래도 생각해 보면 일제 강점기를 사시던 조상들보다는 나은 세상이지 않을까?  일자리와 모든 것을 잃은 분들에게 전하고 싶다. 미션의 제수이트 신부님들과 같이 죽을 각오를 하고 뭔가를 하시라고. 반드시 길을 열릴 이라고 믿는다.

Hyundae News USA   (415)515-1163  hdnewsusa@gmail.com   P.O. Box 4161 Oakland CA 94614-4161
                                                                                                                           ©Hyundae News USA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