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는 가구다

Updated: May 6

이계숙


나는 남편에게 많이 맞추는 편이다. 고집 세고 주장이 강해서 내 마음대로, 내 멋대로 할 것 같지만 전혀 다르다. 매사 ‘당신이 원한다면 당신 뜻대로’인 것이다. 남편 또한 웬만한 일, 이를테면 가구를 산다는가 집안을 리모델링한다든가 같은 일은 전적으로 내 취향에 맡긴다. 그래서 여태껏 크게 의견충돌이 있어 본 적이 없다. 단 한 가지, 우리 둘 다 양보 못 하는 게 있으니 바로 내 머리 스타일에 관한 것이다.


나는 미혼 때부터 ‘파마’를 고수해왔다. 머리라도 부풀려놔야 좀 봐줄 만한 얼굴이니까. 너무 초라하고 빈약하고 볼품없어 보이는 얼굴이니까. 또한 나는 머리 손질에는 젬병이라서 무조건 핀으로 고정해 뒤로 올리거나 묶어야 하는데 머리카락이 구불구불해야 좀 스타일이 난다. 머리숱이 많은 편이긴 하지만 생머리를 묶거나 올리면 자꾸 흘러내리기에 반드시 파마를 해야 하는 이유도 있다.

반면 남편은 내가 파마하는 걸 질색한다. 비단같이 부드럽고 윤기 나는 머릿결을 왜 독한 화학약품으로 칠갑을 해서 망치냔다. 그리고 생머리가 나랑 가장 잘 어울릴 뿐만 아니라 청순해 보인다며 파마하는 걸 말린다. 이 나이에 청순은 얼어 죽을.

남편이 싫어한다고 예, 알았소 할 내가 아니다. 다른 건 다 양보해도, 남편에게 미안하긴 해도 위에 쓴 이유로 나는 죽어도 파마를 해야 하니까. 그래서 파마를 할 때마다 ‘007 작전’을 써야 한다. 나중에 들킬 때 들켜서 잔소리를 듣더라도 일단 처음부터 안 들키게 노력은 한다. 어떤 작전을 쓴다면.


1. 파마를 한다. 그것도 잘 안 풀리게 아주 꼬불꼬불. 2. 미용사에게 드라이기로 바짝 다 말려달라고 한 다음 젤을 발라 머리카락이 한오라기도 내려오지 않게 뒤로 짱짱하게 묶고 집에 간다. 그렇게 하면 꼬불꼬불이 좀 감추어지니까 3. 파마기가 좀 느슨해질 때까지는 집에서도 절대로 머리를 풀어놓고 있으면 안 된다. 샤워를 한 후에도 축축한 머리를 얼른 묶는다.


그래서 그동안 잘 속였냐고? 몇 번은 속였지만, 대부분은 첫날에 들통나고 말았다. 남편 눈이 워낙 매같이 날카로워야지. 그리고 별짓 다해도 파마약 냄새만은 덮을 수는 없었으니까. 남편은 낙심한다. 한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나는 짐짓 딴청을 부리고. 그게 파마를 하고 난 후 늘 일어나는 우리 집 풍경이었다.


얼마 전에도 파마를 했다. 위의 방법대로 며칠은 잘 속이다가 이 짓도 못 해 먹겠다 싶어 될 대로 되라 하고 파마한 걸 숨기지 않았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나. 어라, 이게 웬일. 남편이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는 것이다. 꼬불꼬불 라면 같은 머리를 눈앞에 바로 보면서도 아무 소리를 안 한다. 한마디 들을 각오로 있는데 지금까지도 모르는 것 같다. 알면서도 말을 안 하는 건지 아니면 포기를 해버린 건지.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마음 놓고 파마를 해도 되나 싶어서. 좀 섭섭한 것도 사실이었다. 머리를 지지고 볶든 자르든 말든 알아보지 못하는 남편들이 많다고 하더니, 삭발하고나 나타나도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남편도 있다고 하더니 이거, 내 남편도 그 반열에 들어서는 것 아닌가. 나에 관한 관심이 식었다는 반증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그러나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위가 아닌 이상 사람도 서서히 변해가는 거지. 흐르는 세월 따라 서로 무심해지는 거지….

아주 오래전에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게 '집안에 놓여 있는 가구' 같은 존재라는 글을 쓴 적 있다. 집 안에 있을 때는 있나 보다 무심하게 지나치다가도 어느 날 없어져서 빈자리가 드러나면 허전하고 그 가치를 깨닫게 되는 가구 같다고. 지금 생각해도 캬~, 내 주제에 어쩌면 그런 기발한 표현을 했을까 싶은데 날이 갈수록 맞는 말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서로 적당히 무심하는 것도 괜찮다. 연애할 때 같은 마음으로 어찌 살겠나. 강력본드처럼 상대방에게 집착하면 어찌 살겠나. 일일이 간섭하고 구속하려 들면 어찌 살겠나.

최근, 내 주위의 한 싱글 남녀가 사랑에 빠졌다. 둘 다 적지 않은 나이지만 사랑에 빠진 사람한테 나이가 무슨 상관일까. 정말이지 둘은 불꽃처럼 사랑하는 것 같다. 그들의 늦은 사랑을 축복하지만 속으로 나는 말한다. 그래, 지금 실컷 사랑하라. 머지않아 서로에게 가구 같은 존재가 되는 시기가 다가오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