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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뜻한 글 한 편

주대식

요즘 코로나 때문에 집구석에만 쳐박혀 있으니까 가끔 창밖을 내다 볼 때면 옛날 일이 생각날 때가 있다.

오래전 어느 모임에서였다.  S여사가 은근히 내게 물었다.

'주선생, 제물포고 나오셨어?'

'네, 그런데요?'

'그럼 정진권 선생을 아시겠네?'

'아! 그럼요. 그 분한테서 국어 과목중 '고문'을 배웠습니다.  제 스승이십니다.'

'그랬군요.  근데 그 분 글이 참 좋아.  내가 그 분의 책을 한 권 가지고 있는데 다음 번에 만나게 되면 드릴테니 한 번 읽어보세요.'

'고맙습니다.'

모임을 파하고 집에 왔는데 S여사가 정진권 선생의 글이 좋다고 한 말이며, 그 분의 책을 읽어보라고 한 말이 다시 떠올랐다.

당시 나는 지역 신문에 칼럼이랍시고 정기적으로 기고를 하고 있을 때여서 그 모임에서 오고간 S여사와의 대화에 신경이 쓰였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정진권 선생의 제자라면 글을 좀 더 잘 써야지 않겠냐, 그 분의 책을 보고 공부를 좀 더 하라는 질책으로 들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간혹 나는 좀 쓸데 없이 예민하여 상상력이 비약하는 버릇이 있다.

(여기까지의 일화는 언젠가 칼럼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그리고 몇년이 흘렀다.

서울에서 고교 졸업 50주년 행사가 있어서 미국에 있는 친구 몇명과 작당을 하여 행사에 참석했다.

여행도 하고, 밥도 먹고, 골프도 치고, 한 후에 맨 마지막 날 드디어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파티가 있었다.

그 자리에는 고교 시절의 은사님들도 모두 함께 하셨는데 몇 몇 분은 이미 작고 하신분도 있었지만 대부분 좀 연로하시기는 했어도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들을 반겨 주셨다. 우리들은 한 잔 술도 올려 드리며 옛날 이야기에 흠뻑 빠졌다. 

물론 그 중에는 정진권 선생님도 계셨다.

얼마 전에 몸이 아프시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조금 초최하신 모습인 선생님께 다가가서 깊숙히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회포를 나누었다.

고교시절에 교지 편집할 때 지도해 주신 적이 있기 때문에 션생님은 나를 또렸하게 기억하고 계셨다.

나는 적당히 때를 보아서 미국에서 있었던 S여사와의 대화를 전해 드리고 선생님의 글을 좋아하는 팬이 미국에도 있다고 했더니 맑은 미소를 지으며 기뻐하셨다.

그러면서 이메일 주소와 집 주소를 적어 달라고 테이블에 있는 종이 내프킨과 볼펜을 건네 주셨다.  나는 서슴 없이 적어드리고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는 미래를 기약하고 자리를 떴다.

행사를 끝내고 다시 미국으로 '귀국'한 나에게 서울에서 우편물이 도착했다.

정진권 선생께서 보내주신 자신의 낙관이 들어있는 수필집 두 권이었다.

즉시 S여사에게 전화를 드렸더니 그 책을 한 번 보여 달라고 해서 나는 서슴치 않고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리하여 S여사와 정진권 선생님은 나를 징검다리로해서 저자와 독자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두 분은 서로 만난 적은 없지만 글과 책을 통하여 서로 교감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 가운데 내가 있었다는 사실이 은근히 기쁘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햤다.

얼마 전에 정진권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셨다.

나는 다시 그 분의 저서 '그리운 진이 아가씨'와 '한 수필가의 옛시인 만나기'를 꺼내 읽으며 감회에 젖었다.

수필이라고 하면 윤오영 선생과 피천득 선생이 대명사처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만 시대를 따라 가자면 나는 정진권 선생님도 그 대열에 합류할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선생님의 '그리운 진이 아가씨'의 머리말에 나오는 첫마디, '산뜻한 글 한 편 쓰리라'고 하신 선생님의 염원은 이루신 것일까. 

S여사는 아마도 그 옛날에 나에게 '산뜻한 글'을 한 번 써 보라고 말씀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다시 뵙겠다고 한 말은 허언이 돼 버렸고 나는 선생님의 저서 두권 외에 S여사가 나에게 선물한 또 다른 수필집 '빛깔들의 합창'까지 3권의 책을 꺼내 놓고 앉아서 그 분 생전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다.  

산불로 인한 짙은 오렌지색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옛날 생각이 연기처럼 퍼져 나간다. 

연기가 사라지고 코로나도 플리고 하면 S여사와 만나서 와인이라도 한 잔 하면서 정진권 선생님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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