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한글작가대회에 다녀와서


주제: 재미교포문학에 나타난 주류언어의 사용과 문제

미국 정부는 이민자들의 문맹퇴치를 위해 각 지역마다 교사자격증을 취득한 영어선생님을 파견해 국적과 나이에 관계없이, 무료 혹은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 영어는 물론, 역사, 지리 수학 등 고등학교 수업과정을 이수할 수 있는 성인 교육(Adult school) 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Adult school 은 6년을 기준으로 하고 있지만 개개인의 재능에 따라 그 전이라도 고등학교 졸업장과 동등한 Diploma 라고 하는 수료증을 주고 원하는 대학의 편입과 직업 알선에 도움을 주는 봉사 교육기관입니다. 그러나 우리 이민 1세 대부분은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새벽 별을 보고 일터로 나갔다가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힘든 노동에 시달리느라 주어진 황금의 혜택조차 누리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안고 살아 왔습니다. 제가 사는 지역은 실리콘밸리라고 불리는 전 세계 IT 산업의 중심지로서 많은 한국 기업들도 이곳에 진출해 다른 세계적인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경쟁하고 있습니다. 그 덕으로 El Camino Real (옛날 멕시코 왕족만이 거닐던 거리 이었다고 함) 거리에는 한국 식당과 부동산, 식료품 점 등 한국어로 된 간판들이 영어 간판보도 더 많이 보일 정도입니다. 그러나 제가 미국에 처음 발을 붙일 때인 38년 전만해도 한국 사람들이 지금과 같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동족이 너무 그리워 거리에서 중국인이나 베트남 사람, 혹은 다른 동양인만 만나면 반가워 한참 끌어 않고 울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70년 후반부터 전자회사의 붐이 일어나면서 영어는 잘 못해도 부지런함과 근면함, 또한 뛰어난 솜씨가 알려져 다른 도시에서 몰려든 한국인들의 둥지가 이루어졌습니다. 부인들은 보험업계의 일로, 남편들은 세탁소와 주류 판매점(Liquor store) 그리고 샌드위치 가게 등을 많이 운영하였는데, 어떤 분은 기본적인 영어조차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 손님을 놓치는 경우가 허다했고 그나마도 body language로 소통을 하려다가 보니 코미디언처럼 희노애락을 겪으며 고달픈 삶을 살았었습니다. 이민 1세분들에게서 자주 듣는 말이 있습니다. 미국에 와서 오래 살다 보니, 한국말도 잊어가고 귀동냥으로 얻어 들은 주어동사가 빠진 영어가, 혀를 꾸부리기도 힘든데, 불쑥불쑥 튀어나와 자신도 놀란다고 하는 것에 100% 공감합니다. 예를 들면, See you tomorrow, Let’s go together, Oh my God, Jesus Christ, Enjoy, Have a nice day, Honey, Wife, Darling 등. 1976년, 한인사회가 아직 이곳에 완전히 조성되지 않았을 때, 저는 자의 반 타의 반 낯선 미국 땅에 와서 영주권도 없이 밑바닥에서 굶주림에 허덕이며 어렵게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한 미국 감리교회 목사님이신 은발의 월버 목사님과 이 지역에서 처음으로 한국교회를 창립한 목사님, 그 두 분의 도움으로 영주권을 받았습니다. 그 시절 캘리포니아의 시간당 임금이 2달러 10센트, 한국 돈으로 2,300원. 저는 전자회사의 말단 공원, 청소부와 꽃집, 그리고 샌드위치 가게 등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조금씩 여유가 생기기 시작 했습니다. 빈털터리였던 저는 제 은행계좌에 조금씩 달러가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내 몫이 아니라고 전당포에 잡혀 놓았던 글을 다시 쓰기 시작했습니다.

1989 년, 이민 보따리에 싸 들고 온 200자 원고지 1800매에 글을 쓰기 시작해서 4년여 만에 “양지와 음지”라는 제목의 글을, 주간지 선데이 토픽 김동열사장님께서 ‘아메리카 아리랑, 으로 제목을 바꾸어 처음으로 신문에 연재하는 행운을 안게 되었습니다. 뜻밖에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 장장 2년 6개월여 동안 제 글이 신문에 연재되면서 함께 울고 웃는 영광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독자들로부터 어떻게 하면 자신들도 그렇게 글을 쓸 수 있는지 문의가 쇄도 하였고, 자신 뿐 만 아니라 그들의 자녀들에게 정체성을 심어 줄 수 있도록, 문학 동호회를 만들자는 많은 제의를 받았습니다.

쉽게 장소를 구할 수가 없었던 때에 한미 봉사회 관장으로 계셨던 분으로부터 방 하나를 얻어 실리콘밸리 롸이더스그룹 (Writer’s Group) 이라는 작은 간판을 달았습니다. 모두가 30, 40대의 직장인들로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낯선 나라의 고단한 삶에 대하여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귀머거리, 벙어리가 되어, 이 땅에서 받은 설움, 미국사회에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겪는 어려움들, 고달프고 외로운 우리들의 삶과 한을 토대로 진솔한 글을 썼습니다. 또한 한국 작가들의 좋은 책을 읽고 독후감을 발표하면서 먼 조국을 그려보고, 잊혀져 가는 동요를 부르며 울고 웃으며 동심으로 돌아가는 즐거움을 만끽하곤 했습니다. 그로부터 3년 후에 신아 출판사 서정환 사장님의 배려로 마흔다섯 분들의 글들을 중견작가들의 기고를 함께 모아 “아메리카 아리랑”이라는 책을 발간했습니다. 자신의 얼굴을 담은 사진과 글을 세상에 내놓았을 때 엎어지고 콧등이 깨져도 다시 일어나서 꿋꿋이 버티며 살아온 우리네의 인생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내가 서야 할 땅을 찾기까지의 한 맺힌 사연들을 담은 ‘아메리카 아리랑’의 출판 기념회는 그렇게 눈물바다를 이루었습니다. 실리콘밸리 두 번째 문학집을 출간하고 또 다시 세번째 문학집을 준비하면서 세월의 등 떠밀린 회원들의 나이가 벌써 60대, 70대 혹은 80에 접어들게 되자 숨어있던 복병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 이곳저곳에서 세포가 우직끈, 와직끈 무너지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생존하는 날까지, 자신의 자서전에 한을 담아 토해 내겠노라고 하는 회원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몇 년 전에 한국문단의 거목이라고 하시는 분이 북가주를 방문하셨습니다. 저희 실리콘밸리 롸이더스구룹 주최로 그분을 모시고 문학의 밤을 열어 환영식 겸 특강시간을 가졌습니다. 주요 내용은 가끔 미국에 거주하는 작가들의 책을 받아보면 아름다운 우리나라 말의 문장보다는 영어문장을 많이 사용하는데, 어느 나라에서 어떻게 살던, 우리는 한국인이라고 하는 정체성을 잊어버리지 말아달라는 부탁이셨습니다. 꼭 저에게 말씀을 하시는 것 같아서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영어를 유창하게 잘하지는 못합니다. 40여 년 동안 몇 곳의 미국 회사에서 일하고, 도서관을 오고 가며 본 책들, TV 를 보면서 귀로 익힌 영어를 통해 생활영어를 조금 할 수 있을 뿐인데 글을 쓸 때 어떤 제목이나 문장은 한글보다 영어가 훨씬 편하게 느껴지곤 합니다. 저도 그 이유를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미국사회의 문화와 삶에 어느새 적응해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제가 쓴 소설이나 수필과 시를 들추어 보면 제목이나 내용에 영어로 표기 되어 있는 것이 더러 있습니다. 예를 들면 수필인 경우에 American by choice, not by chance. Target. Happy New Year , You made my day. Forgive, Disaster, Sexy Seventy. Driving test. Standing at the Crossroads of Dusk 등등이 있고, 소설 중간, 중간에 Time flies, Sophisticated Lady. Foxy Lady, Wonderful, Benefit, Oh my god! Beautiful, Relax, I miss you, Charming, She or He makes me nuts. Love 등이 많이 나옵니다. 영어에 대해서는 백지이면서도 제 일상생활에서 흔하게 쓰이는 단어들이라 쉽게 이런 단어들을 선택했던 것 같습니다. 어떤 때는 한글보다 영어가 제 마음을 더 쉽게 표현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도 생각됩니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오랜 이민 생활로 아름다운 한글이 내 마음과 머릿속에서 조금씩 잊혔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저의 국적은 미국인입니다만 내가 자란 나라 한국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고, 또 우리의 혼이 담긴 한글을 항상 사랑해왔습니다. 13년 전에 주머니를 털어 2세들에게 정체성을 키우기 위해 한글학교 협의회에 박은주 새싹 문학회를 만들었고 28년 전에 만든 실리콘밸리 롸이더스그룹을 통하여 한글을 장려하기 위해 14년째 연례행사로 육아수기 공모도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계속 이어오리만큼 한글에 대한 애착이 강합니다. 앞으로 글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우리들에게 주어지면 조금 더 깊이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되도록이면 영어를 줄여 아름다운 우리나라 글을 찾아 다듬어가는 홍보를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먹기 싫어도 세월에 등 떠밀려 먹어가는 나이로 40, 50대의 나이에 ‘실리콘 밸리 롸이더스그룹’ 의 간판을 단 지도 어언 30년이 지났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곳저곳에 숨어있던 복명들이 쳐들어와 세포가 우직끈 와직끈 무너져 병실에 계시다가 그렇게도 살고 싶어 했던 그 하루를 못 넘기고 가신 분, 이런저런 이유로 병원에 누워 계신 분, 눈앞이 가려 운전대를 놓아야 했고, 귀가 어둡고 당뇨로, 관절로, 회원들의 숫자가 눈에 뜨이게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지인들은 후계자 양성을 해야 한다고 하지만 살기에는 편해진 문명의 이기에 도취되어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핸드폰이 세계의 지도자로 둔갑되어 이재가 밝아지고 사랑이 심어 져야 할 가슴에 계산기를 심고 사는 삶의 장터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아픕니다. 이것은 나라사랑, 한글사랑을 격려하고 있는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750만 해외동포들 특히 우리 노인네들이 함께 느끼는 공통점이라고 생각됩니다. 끝으로 이민 일세로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나라사랑, 한글사랑을 지키려고 무던히도 애썼지만 모든 것이 부족하기만 한 우리교민들의 경제와 언어의 빈곤을 용서해 주시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마무리 합니다.

서울에서

<제1화>

하늘을 찌를 듯 다닥다닥 빽빽이 줄지어 서있는 고층건물과 곧 목숨을 담보하듯, 요리조리 비집고 질주하는 운전기사들의 숨 가쁜 행렬을 볼 때마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 내리곤 했다. 어느 날 이었습니다. 인사동에 원로 문인들이 자주 모이는 카페에 들렸다가 도보로 시가를 누려보겠다고 퇴계로 동대문 역사 박람회 가까이 있는 호텔을 향해 걸어오다가 종로까진 왔는데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고 날은 저물어 가는데 눈이 나빠 거리의 표시판도 보이지 않아 택시를 기다렸으나 보이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한테 물어보아도 옛날에는 ‘저 어기요’, ‘저 어기요’ 라고 했는데 모두가 모른다고 하여 길 잃은 나그네 신세가 되었었습니다. 이리 가보고 저리 가보고 약 한 시간을 헤매었을까? 다리에 힘마저 잃고 하나님, 하나님만 찾고 있었는데 내 앞에 경찰차 한대가 멈추더니 경찰 한 분이 내 앞에 다가와서 ‘어디 아프시냐’ 물어왔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건장하고 미남형인 젊은 두 경찰이 내가 서있는 곳은 택시가 다니지 않는 곳이라고 하면서 호텔까지 데려다 주는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몇 번이나 머리 조아려 감사를 드린다고 했어도 부담이 커서 그 두 분의 당직 날 경찰서로 찾아가 끓여주는 커피를 대접받고 미국에 오시면 빚을 갚겠노라고 하면서 명함을 건네주었습니다. 자랑스러운 우리나라 경찰! 인성교육이 바닥을 치는 현 사회에서 한 노인을 위해 업무에 지장을 느끼면서도, 넘치는 친절을 베푼 경찰 두 분에게 지면을 통해 감사드린다고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제2화>

50, 60, 70 년대 김활란 박사가 종로 고려당 이층에 여성협의회를 만들고 이화여대 사회학과를 나온 김천주 선생님의 손을 붙들어 ‘주부 클럽연합회’를 설립하여 눈부시게 사회활동을 할 때, 저는 김천주 회장님 밑에 들어가 사회에 대한 많은 견습을 익혔습니다, 특이 기억에 남는 것은 경복궁에서 열렸던 ‘신사임당 행사’에서 신사임당으로 선택된 시녀로, 화관무 무희로, 정열을 쏟아 부었다가 미국으로 와서 이번 고국 방문길에 50년 만에 처음으로 김천주회장님과 마주 앉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분은 반 백 년이 넘은 긴긴 세월, 그토록 박력이 넘쳐나고 광열 했던 눈빛은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주부클럽연합회’라는 간판대신 ‘소비자 연합회’ 라고 하는 이름으로 바꾸어 4만 명의 회원들을 거느리고 50년이 가깝도록 ‘신사임당’ 행사를 이어가는 보람을 느낀다고 하시면서 신사임당에 관한 책자를 듬뿍 내 가슴에 안겨주셨습니다.

‘신사임당 행사’

아주 오래 전부터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셔서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드리며 전에 ‘신사임당 행사’로 타락한 ‘성인교육’에 대해 한 알의 씨를 뿌리고 가려고 하는 것이 저의 숙원이었습니다. 2년 전인가. 팔방 장부라고 불리는 강 모 모 회장을 찾아가 의기투합을 했으나 아직도 임원진 구성이 확실치 않아 과연 그 날, 신사임당 행사로 한 알의 인성교육의 뿌리를 심어줄 날이 언제인지 설레는 가슴만 부풀어 오를 뿐입니다. 나이 관계로 아마도 이번 고국나들이가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저앉은 40일간의 한국나들이에서 경주 화백 컨벤션 센터에서 3인방의 노벨수상자 들과 함께 각계각층에서 3,000명의 유명 인사들의 만남도 이어진 제1회 세계 한글작가대회에 연사로 참석하게 된 것은 저로서는 감히 뜻밖의 주워진 영광이라 문단 60년에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무대에서 주최 측에 다시 한번 머리 조아려 감사를 드립니다. 또 한글축제의 날은 경주에서 함께했던 분의 초청을 받고 세종회관에서 열리는 창신제도 보고 국립극장에서 열리는 장애청소년들의 공연도 보면서 감동과 이 나이가 되도록 무엇을 했나 돌이켜 보니 자신이 부끄러워져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하면 된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한 점의 부끄러움 없이 여생을 살다 가리라고 다짐해 보기도 했지만, 아직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역시 나이를 의식한 탓 일까요?

틈틈이 시간을 내어 동대문 신평화 남대문 롯데 백화점을 돌며 아이숍도 즐겼습니다. 발길 닿는 곳마다 눈부신 백화점과 군침이 넘어가도록 화려하고 맛깔스럽게 차려진 음식들, 그 뿐만이 아니라 명동을 비롯한 거리거리, 어깨를 비좁고 다녀와 하는 붐비는 인파, 2030대의 조각처럼 다듬어놓은 미녀 아가씨들이 유창하게 중국어와 일본어 러시아 어를 일상화처럼 대화를 이어가는 것을 보고 미국에 사는 우리들은 정체성을 잊지 말라고 시간을 쪼개면서 교회를 빌려 나라사랑 한글사랑을 심어주기 위해 발로 뛰고 있는데… 지금 제가 어느 나라에 서 있는지 혼돈스러웠습니다. 물론, 외화획득? 호텔식당에서 가끔 한 테이블에 앉아 아침을 같이하는 외신 기자라고 하는 일본인은 한국은 무서운 나라라고 하며 100년도 되지 않아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나라를 짊어지고 갈 젊은이들에게 만일을 대비한 애국심은 기르지 못했다고 하면서 한국은 부익부 빈익빈 양면의 동전 같은 이중성이라면서, ‘한국은 돈만 있으면 천국’이라고. 공감했습니다. 제가 다시 태어나 재벌이 된다고 한다면 그 때도 애국과 역사를 등진 ‘우리나라는 돈만 있으면 천국’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되뇌어 봅니다. <끝>

필자 박은주 회장이 주제를 발표하고 있다.

행사장에 도착한 직 후 도우미들과 기념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르 크레지오 노벨 문학 수상자(프랑스)와 함께

러시아 문학 수상자 왼쪽의 두번째 신세훈 자유문학 이사장

이상문 PEN한국본부 이사장님과 왼쪽 자유문학 신세훈 이사장님, 제 옆이 노미히히데키 수상자(일본)

오른쪽 박현범 경위와 함께

50년 만에 만난 김천주회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