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원 대기자


[베이포럼]

지난 주말 기자연합회 창립 행사에서 거의 30여 년 만에 다시 이경원 대기자를 만났다.

필자가 이번 행사에 간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이철수(작고) 살인사건으로 널리 알려진 이 대기자는 원래 사건 폭로기자로 명성이 높았다.

그야말로 걸리면 겁나는 기자였다.

미국 기자라면 누구나 받고 싶어 하는 퓰리처 상 후보에 오를 만큼 미국 주류사회에서 알아주고, 존경 받는 기자였다.

그가 일 했을 당시 일간지 새크라멘토 유니언(Sacramento Union / 현재 Sacramento Bee로 변경)은 이경원 대기자의 활약으로 지방 일간지에서 미주 대신문 반열에 오르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그런 이 대기자도 이젠 구순에 가까운 노인이 되었지만 오늘 보니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필자를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주간현대는 알고 있었다.

1980년대 샌프란시스코 동아일보 지사에 근무할 때 뵈었다는 이야기를 하니 자신은 너무 오래 돼서 기억에 없다면서 매주 새크라멘토 코리아나 마켓에 가서 주간현대를 픽업해서 본다고 했다.

필자가 발행인이라고 소개하니 너무나 반갑다면서 주간신문이 매우 니트(neat)하다는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특별히 주간현대 본국 심층취재 기사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주간신문 심층기사들이 대부분 폭로성 기사가 많다 보니 폭로기자의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하여튼 이 대기자가 한인사회에 나와서 강연을 하고 한인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모습을 볼 때 아직도 한인사회를 위하여 할 일이 많아 보였다. 끝으로 이 대기자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정진하고 있는 동포기자들의 노고를 치하 하면서 기자는 리포터로, 교육자로, 조직자로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는 덕목도 새삼 일깨웠다.

이철수 사건을 통해서

이철수 사건은 1977년 차이나 타운에서 발생했다.

이철수는 중국인 갱단의 두목 살해 사건에 연루 되었다.

70년대 만 해도 차이나타운에는 갱단의 활동이 상당히 왕성했다.

그런 시대에 갱단의 살인 사건에 연관 되었으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러면 이철수는 누구였나.

당시17세 소년이었다. 다시 말하면 차이나타운을 배회하던 부랑아나 다름이 없었다.

당시 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명확한 물적 증거도 없이 재판에 넘겨져 사형선고를 받고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변론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정당한 절차도 없이 억울한 죽음을 눈앞에 둔 것이다.

이때 이 대기자는 사건의 실체와 불공정을 끈질기게 폭로하면서 경찰이 무고한 사람을 사형수로 몰았다고 비판했다.

지금도 경찰의 과잉수사가 말썽이지만 70년 대는 더 심했다.

경찰의 총격사고는 대부분 정당방위로 인정되고 무고한 희생자만 양상했다.

이런 시대에 이철수는 한국인이라기보다 아시안 인에 대한 인종차별로 비화 되면서 미국사회를 들썩이게 했다.

이철수가 법원의 명령에 따라 사형선고에서 다시 재판을 하라는 선고에 따라 석방 되면서 이 대기자의 이름은 미국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가 다른 기자와 다른 점은 대단히 구체적인 취재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적당 적당이 통하지 않는 기자였다.

공권력과 권력자들에 의한 무고한 시민의 피해를 보면 그는 참지 못하는 정의심이 있었던 것이다.

이철수 사건으로 그는 미주 최고 기자의 반열에 올랐다.

이철수 사건을 보면서 그 몸 속에는 한국인 이라는 DNA가 너무 강했는지 알 수 없다.

LA폭동사건

이 대기자는 아직도 LA한인 타운 폭동사건 이야기 나오면 분이 안 풀리는 듯 했다.

지금부터 거의 25년 전 1991년 3월 3일 과속으로 운전하던 흑인 운전자 로드니 킹이 몇 명의 백인 경찰관들에 붙들려 집단 구타를 당했다.

공교롭게도 3월 16일 두순자라는 한인이 운영하는 가게에 캔 음료수를 절취한 한 흑인소녀와 실랑이를 하던 중 수차례 안면을 강타 당하자 두순자는 권총을 발사하여 그 소녀가 사망하고 흑인사회의 분노를 폭발 시켰다.

당시 미국 언론이 두순자 사건을 집중 보도하면서 LA폭동이 흑인과 한인의 갈등처럼 변화 돼 인접지역 한인 타운으로 폭동이 번졌다.

결국 미국 언론의 교묘한 플레이로 흑인들의 백인에 대한 분노가 한인들에게 돌아가도록 한 것이다.

이로 인해 한인 타운이 무자비하게 약탈 당하는 LA폭동의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나중에 주방위군 6천명과 연방군 1천여 명이 투입 되면서 진정사태를 맞이했지만 한인들이 물질적 정신적 타격은 예상을 훨씬 넘었다.

그 이후 많은 한인들이 LA를 떠나고 미국 언론과 경찰에 대한 불신을 심게 했다.

이날 이 대기자는 LA폭동 당시 자신은 잠도 자지 않고 현장에서 취재활동을 했다면서 한인타운 약탈 및 방화 사건은 한인의 잘못이 아니라 미국정부의 잘못된 정책에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미국정부는 미국내 일본인들을 전부 정부 수용소에 감금했다.

일본과 전쟁을 하니 미국 내 일본인 첩자 또는 동조자가 나올 것을 우려한 것이다.

일본인들은 특별한 이유도 모른 체 4년 동안 수용소 생활을 했다.

일본인 후손들이 이에 대한 미국정부의 책임을 물어 리건 정부 당시 2 Billion에 달하는 거액 보상금을 받았다. LA폭동도 미국정부와 주류사회 미디어가 소수계 대립처럼 몰고 가는 바람에 한인 타운이 폭동의 희생양이 되었다. 한인 후손들도 LA폭동을 그저 지나간 사건으로 간주하지 말고 일본인 후손들이 60여 년이 지난 후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정부의 잘못된 정책으로 일본인들의이 피해 보상을 받은 것 처럼 우리 한인들도 LA폭동을 재조사해서 미국정부와 언론의 잘못을 밝혀 책임을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경원 대기자는 그날 강연에서 우리와 후손들에게 너무나 큰 숙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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