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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델리 야무나 강가의 사람들


<자전 회고>

우리 가족이 1982년 인도에 정착할 무렵, 인구대국의 수도 뉴델리에는 사상 처음으로 주최하는 아시안게임 준비로 온 도시가 소란했다. 도로와 상가를 단장하는 인부들은 먼지를 피우고 있는가하면 신축하는 호텔들 현장에서는 붉은색 벽돌을 머리에 얹고 분주하게 오고가는 사리를 입은 여인네들이 눈길을 끌었다. 저렇게 여인들의 머리로 어떻게 공사들이 제 시일에 완성되어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이할 것인가 하고 염려를 했었다.

아시안게임의 준비 탓인지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이 위치한 야무나(Yamuna)강가의 근처에는 도시 임금에 매혹되어 새로 이사해 온 시골사람들이 장막을 임시로 치고 사는 마을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이처럼 도시외곽의 빈터에 임시로 거처를 만들어 사는 빈민굴을 인도에서는 ‘조기’ (Jhoggy)라고 부른다. 아시안게임을 준비하고 환영할 이 도시의 인구 4분의 1은 조기마을에 거주하는 시민들이라고 했다. 조기 뜰에는 앉아서 더위를 식힐 나무 그늘이 없음으로 뉴델리의 아침과 저녁을 소란스럽게 하는 까마귀들의 억센 울음소리는 들을 수가 없다.

도시로 이주하는 국내이민을 우리는 도시화 현상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한정된 농토를 대대로 태어나는 자녀들이 나누워 갖다보니 경작지가 점점 작아지면서 도시의 노동임금에 눈이 뜨게 되여 불가불 고향을 떠나오게 된 용감한 사람들이다. 그 이유야 어쨌든 세계비동맹국들의 선두에 있는 인도의 수도에는 당시 600개의 조기마을에 120만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인도에 농촌-도시 이주가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978년, 그러니까 미국 스탠포드대학 생물학교수 ‘엘리치(Ehrlich)가 인도의 여러 지역을 방문한 후 저술한 한 ’인구폭탄‘이 출간 된지 10년 후의 일이다.

현대식 건물 5층에 있는 내 사무실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야무나 강가는 하루같이 아침부터 조기사람들이 벅적대는, 마치 한국의 장터처럼 분주한 곳이었다. 그들에게 야무나 강은 히말라야산맥 기슭에서 시작하여 1천4백km를

거쳐 ‘갠지스’강에 힌두 교인들의 성수로 흘려보내는 단순한 하천이 아니고, 매일의 삶이 전적으로 의존되는 부양(扶養)처소인 듯 했다. 물줄기는 그들의 샘물이자 빨래터이고 강바닥은 한때 영국시민들이 사용하던 런던다리 밑 옥외화장실과도 같은 곳이다. 강 언덕에는 큰 화장(火葬)터 여럿이 있는데 땅바닥에 쌓인 여러 개의 장작더미가 매일 요란하게 타면서 불길과 연기가 하늘에 솟아 고해인생의 마지막을 전송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인도양의 계절풍(Monsoon)이 부는 여름날에는 야무나 강의 빨래터와 화장터 모두는 뒤범벅이 되어 시시각각 여러 색으로 변해갔다. 강가에 제멋대로 흩어진 인분(人糞)과 생활 쓰레기는 바람에 날려 마치 봄날의 꽃잎처럼 하늘을 가린다. 여름철에 꽃잎처럼 내리는 먼지를 인도의 도시화가 만드는 ‘여름날의 눈’이라고도 부른다. 뉴델리의 조기마을 사람들에게는 1951년 내가 부산 대청동의 난민촌에서 경험한 것처럼 먹은 것을 처분하는 것이 먹을거리를 구해오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이 아닌가 싶었다.

짧은 강수기가 지나고 긴 건조기가 이어지다보면, 조기마을사람들은 갈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음료수를 구하기 위해 하늘에 들어낸 강바닥을 파거나 더러는 영국 식민지통치하에서 만들어진 뉴델리 수도관을 부수고 물을 훔친다고 했다. 당시 인도의 한 일간지는 파손된 수도관은 5백여 곳이나 된다고 보도했었다. 이렇게 수도관이 파손되는 탓인지는 알 수 없어도, 우리 가족이 정착한 주택가에는 수돗물수압이 낮아서 집집마다 두개의 물탱크가 설치되어 있다. 하나는 지하에 다른 하나는 옥상에 있는데, 지하탱크에는 하루 종일 아니 일 년 열두 달 수도꼭지를 열어서 힘없이 흘러나오는 수돗물을 받았다가 펌프로 옥상탱크로 올려서 가정용수로 사용하는 것이 이곳 고급주택가의 급수문화로 알려져 있었다.

뉴델리에 짧은 겨울이 오면 조기촌의 긴 밤은 연기가 안개처럼 온 마을들을 감싸곤 했다. 소똥으로 빚어 누룩처럼 만든 땔감으로 밥을 짓고 방을 따뜻하게 하지만, 연기는 굴뚝이 없는 탓으로 솟아오르지 못하고 숨어 나오기 때문이다. 분지에 자리 잡고 있는 뉴델리에 바람이 없는 아침이면, 소똥연기는 한 폭의 동양화 처럼 온 조기마을을 안개 속에서 깊은 꿈을 꾸게 한다. 내가 지켜본 야무나 강가의 그 조기마을에도 가끔 국기가 높이 달리고

전기 불빛과 더불어 라디오 소리로 축제행사를 할 때가 종종 있었다. 그때가 바로 인도의 민주주의가 소란을 피우는 선거계절인 것이다.

2010년 여름 미국의 한 일간지가 사진으로 보여준 야무나 강가의 조기마을의 전경과 생활모습들은 내 눈으로 8년간 지켜본, 20년 전의 그 옛날과 다를 것이 별로 없었다.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변하지 못하게 방해 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그 옛적 내가 반복했던 질문을 다시 되풀이 하게 했다. 인도는 큰 전쟁을 치룬 일도 없고 아프리카 나라들처럼 역모 쿠데타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세습전권자의 폭정(暴政)이나 쇄국정책에 의해서 경제활동이 제재를 받아온 것은 더욱 더 아닌데! 식민지통치하에서도 한반도의 우리 조상들처럼 진학의 기회나 문화가 약탈당한 역사의 과거도 없었다. 오히려 해외유학의 기회까지 제공되고 권장되어 서구문물에 더 가깝게 접근해 있었고 또 무혈독립으로 민주주의 정부를 일찍히 건립한 한, 그 많은 식민지후진국들 중에서 한때는 가장 앞선 나라가 아니었던가!

야무나 강가의 조기마을에는 그렇게 변화가 없는 것은 그들이 지닌 고질적인 빈곤이 자아실현의 의욕 모두를 빼앗긴 탓인지 모른다. 그 원인이 무엇이던 그들은 침체(沈滯)에 익숙해진 탓인지 아무런 불만이나 반항이 없는 것만 같다. 어쩌면 그들은 현세에서 무엇을 하다가 어떻게 끝나든 다시 태어 날 세상에서는 극락왕생이 보장된다는 ‘환생(還生, Reincarnations)’에 매혹되어 사는 탓인지 모른다. 그들에게 윤회(輪廻)는 현 세상의 온갖 어려움들을 참고 견디며 기다려야만 하는 유일한 희망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야무나 강가의 장작불속에서 삶을 마감하는 고인들의 유족들로 부터는 좀처럼 애달픈 울음소리는 들을 수가 없었고 또한 노란 색 리본을 단 조문객도 보이지 않았다. * 저자 방용호 박사는 6.25 전쟁으로 1950년 이산가족이 되어 홀로 월남하였다. 서울에서 동국대학교를 졸업한 후 이승만 장학금을 받고 미국에 유학하여 미국 워싱턴 주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세계 보건기구(WHO)의 직원으로 30년 가까이 해외에서 근무하여, 태국 연구관 4년, 동아프리카 탄자이나 연구관 4년, 서아프리카 나이지리아 팀장 4년, 인도네시아 팀장 5년을 역임하였고 세계보건기구 동남아시아 지역본부 인도 뉴델리 고문과 8년, 인도네시아 정부 이동식 직업훈련사업 수석고문관 3년을 역임하였다. 그가 출판한 서적으로는『신음하는 지구촌』,『물 있는 사막』,『ONE DOLLAR A DAY』,『고향을 떠난 사람들』,『인생은 만남의 연속』,『기독교인의 과외공부 등이 있다. 현재 은퇴하여 부인과 미국 나파에 살고 있는 그는 글쓰기와 골프, 화단 가꾸기로 남은 여생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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