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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만 더…


<신년문단>

새 출발, 새 인생을 살기 위한 설계로 들어갔다.

옛 어른들이 말하기를 사람들은 세 번의 행운을 맞는 기회가 주어진다고 하였다.

에스터에 대한 애정이 애증으로 변하면서 머리를 숙이고 있었던 권력과 화려한 명예에 대한 욕망이 서서히 꼬리를 물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거머쥘 수 만 있다면 한 번 만 더 거머쥐어 보자”

어머니를 비롯한 일가 친척들의 말대로 탐의 죽음으로 에스터와의 흔적은 보기에는 아무 것도 남은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입으로만 쏟아낼 뿐, 생각과 생각의 꼬리를 물고 떠 오르는 탐의 죽음은 끔직하리만큼 잔인해 누구를 향한 분노인지 주먹같은 울분이 불끈불끈 솟아오르곤 했다.

혁이 미국유학이라고 하는 명분으로 오레곤에 있는 쿠수베이에 와서 발을 들여놓고 굶주림에 허덕일 때, `아들이 6,25 한국 전란 때 참전하여 전사를 하고 한국 여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을 남겨두어 에스터라고 이름을 지은 손녀딸을 데려다가 키우는 보람으로 산다고 하는 할아버지를 만났다. 할아버지는 조상으로부터 이어받은 산판을 운영하는데 종업원들을 두고 있긴 해도 항상 손이 모자라 젊은이의 힘이 필요하다고 했다.

혁은 행복했다. 침식제공에 2살 아래인 금발의 인형같이 예쁜 에스터와 나란히 학교도 오가고 하늘을 찌를듯 울창하게 뻗어있는 나무나무사이를 누비며 껑충껑충 뛰어 다니기도 하고 때로는 해변에 앉아 모래성도 쌓으면서 바쁠 때는 할아버지의 일감도 도맡아 했다.

혁의 나이 스물넷, 공과대학 3학년, 에스터의 나이 스물둘, 간호원.

어느날, 할아버지가 혁과 에스터를 나란이 불러 앉쳤다.

‘아무래도 내가 갈 날이 멀지 않은 것 같구나. 이제 너희들 성인이 되었으니, 결혼하여 힘을 합쳐 대물림으로 산판 사업을 이어가 주었으면 한다. 이 할아버지의 유언이라고 생각하고.’

혁으로서는 뜻밖의 일이었다.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대학에 들어가 미국 제일의 건축가가 되겠다고 하는 야무진 꿈을 키우면서 언제부터인가 에스터에 대한 사랑이 깊어갔지만, 까만머리와 노랑머리와의 인종차별이 느껴지는 쿠수베이에서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현실이였다.

‘할아버지! 고마워요 나도 할아버지께 말씀 드리려고 했었는데 혁씨 사랑하다고’

땡큐땡큐를 연발하며 할아버지의 목을 감싸안고 기뻐하는 에스터를 보면서 당황하기도 했지만, 혁의 마음은 황홀하기만 했다.

박사학위를 받고 결혼하자. ‘아니야 결혼하고 박사학위 받아도 돼’ 둘이 옥신각신 오고가는 말을 들은 할아버지가 ‘나 죽기전에 외손자 외손녀 안아 보고 싶으니 하루라도 빨리 결혼하기 바라는데…

혁과 에스터는 할아버지의 바램대로 서둘러 결혼식을 올렸다.

할아버지와 남편 혁, 아내 에스터, 혁은 학교로 에스터는 간호사로, 몸이 쇠약해진 할아버지가 일선에서 물러나 혁은 할아버지의 바램대로 그들은 행복했다.

결혼 일년만에 아들을 낳았다. 할아버지가 ‘탐’이라고 하는 이름을 붙쳐주었다.

탐이 2살 되던 해 할아버지가 노쇠하여 돌아가시고 혁이 사업을 대물림을 받은 후 공학박사 학위도 받아 에스터와 함께 아들을 데리고 그리고 그리던 귀향길에 올랐다.

조금 두렵기는 했지만 아들까지 낳은 며느리를 설마? 딴에는 예쁜 금발의 며느리와 푸른 눈을 가진 손자아들을 어머니의 품에 안겨 드릴 생각으로.

그런데 대문에 빗장을 걸어둔 채, 어머니를 비롯한 누나들도 얼굴조차 내 보이지 않았다.

‘이럴수가? 이럴수가? 동네 사람들이 대문 밖에서 몇 시간을 오들오들 떨고 있는 에스터와 탐을 괴물 보듯이 낄낄 거리면서 힐난했고 아이들은 꽁꽁 얼어 붙은 타다 남은 연탄재를 뭉쳐 들고 탐을 향해 던지곤 했다. 혁은 에스터가 아이들을 향해 그만하라고 팔을 들어 아이들을 쫓아 나무라는 순간, 탐이 얼굴에 묻은 연탄재를 털면서 마미!마미! 부르면서 혁과 에스터를 향하여 달려 가다가 마주보고 달리는 차에 머리를 부딪쳐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피가 낭자한 탐을 본 에스터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응급차에 실려갔다.

혁은 싸늘히 식어가는 작은 몸의 탐을 안고 이럴려고 이럴려고 고향을 찾아왔나 땅에 머리를 박고 울부짖었다.

‘누가 내 아들을 죽였나, 내 아들 내 아들을 살려내라’

가슴을 치고 몸부림을 치면서 미쳐 버릴것 같았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고 하는 사랑하는 아들은 대답도 없고 돌아 오지도 않았다.

어찌 그날을 잊을까? 그러나 그 끔직했던 그 참혹함을 잊어야만 했다. 깨끗이 잊자. 잊어야만 된다. 살기 위해서는 칼로 산산히 뼈마디를 갈라내는 그 고통을 묻어버리고 새 출발을 하기에는 다시없는 기회라고 하는 생각도하며 다시 일어서 야망과 욕망에 불을 지펴보고자 했다.

시계를 거꾸로 돌려놓았다. 거꾸로 돌려놓은 시계를 바로 맞추어 다시 한 번 거머쥘 수 있는 모든 것을 손안에 완벽하게 거머쥐고 에스터 앞에 무릎을 꿇고 처절하고 잔인했던 탐의 죽음과 병적인 고정관념의 희생이 된 것에 용서를 구하겠다고 하는 일념에 불꽃을 당겨보며 일상으로 돌아가고자 자신을 추스렸다.

혁은 매부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50대의 부부가 살고 있는 문간방을 얻어 자취를 시작했다.

냄비 하나에 젓가락과 숟가락 하나. 그리고 접시 하나, 가난했던 유학시절에 비하면 주인아주머니가 연탄불을 갈아주고 가끔씩 김치와 밑반찬도 건네주는 따뜻한 손길이 있어 훈훈했다.

며칠 후였다.

매부의 말대로 자취방에서 10분이면 오고갈 수 있는 모 대학에서 교수 초빙도 받았다.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 새로운 견문, 특히 한국대학의 교단에 선다는 것은 혁에게 있어 뿌듯하고 미묘한, 제 이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전주였고 에스터와의 환영과 화려했던 모든 과거, 체력의 한계를 느낄만큼 감당할 수 없었던 엄청난 상처들을 훌훌 털어 버리고 딛고 일어서는 발판이 되었다.

혼신을 다했다. 자신의 앞날만을 위하여 투자하는 시간만을 살기로 했다. 뒤돌아 보지 않고 새로 태어나는 모습으로 앞만 바라보고 당당히 살아가자고 했다.

젊은 기백이 넘치고 미국에서 목재 산지로 유명한 오레곤 주의 해안에 있는 아름다운 ‘쿠스베이’에서 쌓아 올린 건축에 대한 이력과 경력이 풍부하여 학생들 사이에 실력 있는 교수로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며 자신의 존재가치를 다듬어 가면서 불굴의 의지로 학계에서 명성 높은 교수로 남고자 했다.

그때 쯤이었다.

학장실에서 혁을 부른다는 전갈이 왔다.

“실력 있고 학생들의 인기가 좋은 교수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부에 현욕되어 미국인과 살던 딸과 관계를 맺고 아이까지 낳은,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사회를 좀먹는 사람은 아무리 학문적으로 우수하다고 하여도 대학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패륜아라고 단죄하라”고 하는 학부형들의 투서가 빗발치게 들어와 학교 측에서는 도저히 최 교수를 구제할 방법이 없다는 싸늘한 호령이 내려졌다.

상대가 절벽이고 사회가 절벽일 때는 맞서 싸울 가치가 없었다. 굳이 자신을 설명할 이유도 구차한 변명조차도 늘어 놓을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던 혁은 그 자리에서 사직서를 냈다.

무엇이 타락이며 무엇이 패륜아인가?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 하였거늘, 총각 처녀가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거늘, 무엇이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사회를 좀먹었다는 것인가? 6.25 동족 상잔에 국운이 약하여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젊은 미군 용사들이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움터에 와서 목숨을 걸고 지켜 주었다.

짚차를 몰고 좁다란 논두렁 언덕길을 달리다가 차가 전복되어 차 밑에 깔린 미국병사를 구하고 치료해 준 생명의 은인같은 한국여인을 만나 사랑하여 결혼하고 딸을 낳았는데 아버지가 전사하고 어머니마저 죽고 할아버지가 전사한 아들의 핏줄을 찾아 미국으로 손녀를 데리고 가서 훌륭하게 키워 굶주림에 허덕이는 유학생이던 자신을 손자처럼 보살펴서 마치 오누이처럼 자라다가 정들어 사랑이 트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거늘. 그것이 왜 왜 타락인가. 분노에 찬 눈동자가 강요된 의식 속에서 부글부글 가마솥의 여물처럼 끓어 올라 세상을 향하여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기형적인 사회 의식구조와 가치관이 다른 그들의 고정관념에 얽매여 세인들의 야유와 조롱을 받으면서도 입을 다물고 오물통에 코를 박아야 하는 모순, 문명은 세계를 뻗어가고 사랑을 녹이며 평화를 외치는데,. 유독 작은 땅에 사는 한국사회는 얼어붙고 인종차별에 대한 인식이 병적으로 심각했다.

생과 사

혁에게 있어 현실적인 삶의 무게는 어둠처럼 막막하기만 했다. 또 다시 천리 밖 낭떠러지로 추락해야 하는 자신의 참담한 모습,

의식적으로 강요된 사회의 배경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의식구조의 희생자. 휘청거렸던 두 다리에 힘을 받아 딛고 일어서려던 그 한 평의 땅마저 혁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나더러, 나더러 어떻게 하란 말인가? 과연 내가서야 할 곳은 어디인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도저히 자신의 체중과 의식으로는 지탱할 수 없는 혹독한 고문 같은 형벌이 혁의 목을 조여 오며 길을 잃고 방황하는 방랑자처럼 서서히 아주 깊은 수렁으로 몰아넣었다.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잘 살아보자고 욕망의 탑을 쌓아보려고 몸부림을 치던 안간힘은 여지없이 허물어져 버렸다. 돌아가야 할 빈 둥지도 없다. 남은 것이 있다면 휘청거리는 발걸음이 닿는 대로 무작정 옮겨 갈 수 있는 육신 뿐이었다.

산다는 것이 지옥처럼 고통스러웠다. 외로웠다. 갑자기 밀물처럼 밀어닥치는 허탈감, 모든 과거가 허물어진 그 빈자리에 그 것이 농락이며 타락인 줄 알면서도 누구인가가 채워주기를 갈망했다.

마시고 또 마셨다. 술이라고 하는 환각제에 취하여 발길이 닿는 대로 문을 두드렸다. 아침이 되면 작은 창문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을 받으며 알몸을 내 놓은 자신의 옆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입을 벌린 채, 침을 질질 흘리면서 잠에 빠진 낯선 여인의 얼굴을 발견했다. 소스라쳐 놀랐다. 알몸과 알몸이 되어 뒹굴다가 쏟아버린 끈적끈적한 뿌연 액체가 흥건히 베여 있는 요바닥. 처음에는 당황했고 수치스럽고 자신이 한스러워 구겨진 이불로 몸을 가리기도 했었지만, 햇수가 거듭될수록 오히려 당당해지고 피빛처럼 입술을 짙게 바른 여자가 천박한 눈웃음을 치며 가슴을 파고드는 아양에도 익숙하여져 갔다.

‘마시자, 마시고 또 취하자’마음과 몸이 한꺼번에 썩고 문드러질 수 밖에 없는 나를 원한다면 어느 누구라도 사양하지 않으리라. 몇 번이고 몇 백 번이고 발가벗은 너의 몸 위로 올라가 지진이 나도록 마음껏 흔들어주마‘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술과 여색으로 중독 되어있는 혁의 정신은 흐려지고 전신에 피가 말라 앙상하게 뼈만 남은 기생충 같은 잉여인간이 되어갔다.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없는 자식이라고 하는 혈연의 관계, 그런 혁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어머니를 비롯한 매부와 누님들은 조상의 묘를 잘못 써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가문을 망쳐 놓고 씨를 말린다고 대성통곡을 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어머니는 정승판서의 가문을 이어줄 며느리 감을 찾는다고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따고 대학교수를 한 장한 아들임을 내세워 동분서주를 했다. 그 길만이 혁을 안주시키는 최선의 길이라고 믿었다. 인물이 뛰어나고 체격 좋고 미국가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온 세상에 둘도 없는 아들의 며느리감, 이 교회 저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마치 약장사처럼 떠벌리고 돌아다니는 그 어머니의 모습도 일그러지고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어릴 때부터 점찍어 오던 혜원이도 아들의 눈부신 출세에 자격미달이라고 밀쳐 버렸었던, 혜원의 집에 두 딸을 앞세우고 찾아가 제발 내 아들 혁을 살려달라고 애원도 해보고 싶었고, 고등학교만 나와도 좋다고 문턱이 닳토록 동네의 매파도 찾아가고도 싶었으나 생각할수록 분통만 치밀어 오를 뿐, 그 알량한 자존심은 왠지 강하게 솟구치기만 했다.

매부도 혁을 바로 잡아주는 힘은 사랑으로 감싸안아 정신적으로 안정시키는 일이라고 믿고 다독거리며 심신이 멍들고 허약해진 혁을 데리고 정신감정도 받아보고 약물치료도 적잖이 해보았지만 그 모든 것은 허사로 끝났다.

어느 날이었다.

통금이 가까워 오는 시간이었다. 술에 만취되어 비틀거리며 자취방의 문고리를 잡았었을 때였다.

누구인가 자신의 몸을 감싸 안으며 몸을 부축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미풍처럼 다사롭고 향긋한 냄새가 살며시 코 속으로 들어오는 은은한 재스민의 향기! 죽도록 그립고 뼈가 으스러지도록 보고 싶어 쏘나기 같은 눈물을 펑펑 쏟던, 그렇게도 그립던 에스터의 화사한 얼굴이 실로 오랜만에 뿌연 안개 속에 아른거렸다.

“에스터!! 꿈이요 생시요. 내가 당신을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데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했는데”

다시 세상을 안은 듯 황홀했다.

방안으로 들어선 혁은 거추장스럽게만 보이는 에스터의 옷과 자신의 옷을 활활 벗어 던져버렸다. 혁의 숨결이 거칠어지면서 마치 수증기를 내 뿜듯 그 숨결도 뜨거웠다.

어머니를 비롯한 누님들도 물론 삼촌에 이르는 대소가의 친지들이 가문을 이어갈 사대독자가 노랑머리에 파란눈의 며느리가 낳은 손자아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정승판서 가문을 쑥대밭으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혁의 머리에서 경련이 일었다.

낯설고 물서른 곳에 유학을 가서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헤매일때, 목재상을 하는 할아버지의 아들이 6.25 참전용사로 자원했다가 전사했고 한국여인과의 사이에서 손녀 딸을 만나 얼마나 행복했던지. 박사학위를 받고 에스터와 결혼하여 아들까지 낳고 할아버지의 유언을 받아 목재상의 거부가 되어 쿠스베이의 유지가 된 것은 모두가 할아버지와 에스터의 헌신 때문이라고 몇 천천만번을 말해도 ‘내 눈에 흙이 들어간다고 해도 천만에… 너의 성공을 위해 뒷바라지보다 더 한 세상을 너에게 쥐어 준다고 해도 절대로 아암, 절대로 우리 집안이 어떤 가문인데’ 여권이 난도질을 당해 부스러기가된 종이들을 주서모아 움켜쥐고 무릎꿇고 두 손 모아 빌어도 집안 어른들의 결사반대 앞에서는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시간을 내어 모처럼 에스터와 아들을 찾아온 금의환향의 찬란한 꿈은 무참히 짓밟혔다.

응급실에 실려가 이틀만에 깨어난 에스터는 탐의 죽음 앞에 모든 것을 잃었다는 듯이 혁과의 이혼을 선포하고 그 길로 대사관으로 달려가 이혼수속을 밟고 함께 온 대사관 직원의 보호를 받아 미국으로 갔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이혼? 모든것이 악몽이기를 바랬지만 가혹한 현실앞에 혁의 무릎이 꺾였다.

혁에게 있어 이별이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모든 것을 잃었다는 허무와 소지처럼 타오르는 에스터의 사랑이었고 핏줄을 이어받고 태어났던 탐의 죽음이었다. .

지금 혁은 그토록 그리운 에스터의 품이 아니고서는 느낄 수 없는 감미로운 향기, 짜릿하고 찟기는 듯한 쾌감에 촉촉히 젖어오는 땀 냄새, 물살처럼 번지는 환희의 경련,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혁은 에스터의 온몸 구석구석을 입술로 더듬으며 오래도록 아주 오래도록 목마르게 갈망했던 에스터의 체온을 느끼면서 황홀한 희열에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고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찬란한 밤이었고 광란의 밤이었기도 했다. 하루를 일각이 여삼추같이 기다려온 밤이 이어져 에스터와 함께 밤에만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

얼마 만인가 혁이 눈을 떴을 때는 길가로 나있는 작은 창문을 비집고 눈이 부시도록 환한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몸을 벌떡 일으키려던 혁은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에 쿵 하고 소리를 내며 다시 자리에 나뒹굴어졌다.

이 구석 저 구석 작은 방안이 차도록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던 타이, 양말, 허리띠, 손수건 같은 소지품들이 가지런히 걸려있고 정성을 담은 여인의 손길이 아니고서는 차릴 수 없는 밥상이 한 쪽 구석에 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나 누님이 다녀간 흔적은 분명히 아니었다. 다시 몸을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두통은 현기증까지 몰고 왔다.

머리맡에 놓여 있는 하얀 편지 봉투가 눈에 띄었다.

혁은 발신인이 없는 편지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혁씨!!

하루가 천년처럼 기다려 온 긴긴 세월이었습니다.

당신의 과거가 어떻든 또 현재의 당신이 어떻든 당신은 제 마음속의 영원한 남편으로 살아 숨 쉬고 계십니다. 제가 아주 어릴 때부터 부모님들은 “네 남편감은 혁으로 정해져 있노라” 고 말씀을 하시곤 하셨습니다.

그 연유로 제가 자라나면서 당신의 목소리만 들어도 당신의 등만 바라보아도 가슴을 설레며 당신은 저의 가슴에 각인되어 당신의 운명 속으로 빨려 들어가 행복하곤 했었습니다. 유학을 떠나시는 당신을 기다리며 형설의 공을 세워 금의환향 하시라고 두 손 모아기도 드렸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아내와 자식을 둔 한 가정의 가장으로 변모되신 모습으로 제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그 때, 저는 부모님들에 의하여 잘못 끼워진 단추 구멍이라고 스스로 마음을 달래면서도 아픔과 허탈에 솟구쳐 오르는 슬픔을 감수하며 당신의 행복이 곧 저의 행복이라고 믿고 초라하고 쓸쓸하지만 당신의 생각만으로도 행복했었습니다.

어젯밤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품었고 저는 제가 사랑하는 한 남자의 결정체를 안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이를 주시면 당신이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의무와 이유, 그리고 당신의 몫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삶은 위대한 것이고 열등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삶은 자신을 사랑하는 자의 승리라고 하였습니다. 고통스러웠던 과거까지를 사랑하며 세월에 삭히시어 새로운 사랑과 꿈을 키워주세요.

건강하신 모습을 뵙게 되기를 기원하며 당신의 고통을 함께 하는 혜원드림

눈앞이 아찔했다. 도대체 어젯밤 누구와 무슨 일을 벌렸는지 기억에 떠 오르지 않았다. 몸이 떨리고 목이 조이는 것처럼 타 들어가는 갈증을 느꼈다. 손에 잡히는 주전자를 들어 입에 대고 꿀꺽꿀꺽 단숨에 주전자의 물을 비웠다.

미칠 것만 같았다. 머리를 굴려 어젯밤 일을 또 다시 떠 올려 보았다. 에스터의 얼굴이 떠올랐다. 소용돌이 쳤었던 광란의 밤 뼈 속 마디마디 녹아 내렸던 쾌락, 그렇다면 에스터가 아닌 혜원이었단 말인가?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안돼 안돼”

눈앞이 캄캄해오며 와들와들 전신이 떨리는 전율을 느꼈다. 혁은 찌그러진 냄비 쪽 같은 얼굴로 미친 듯이 혜원의 이름을 불러대며 ‘당신이 나를 선택한 것은 나 혁에 대한 모독’ 이라고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댔다.

“혜원씨!! 차라리 나의 목을 치시오. 감각과 감정이 있는 사람이기에 조율할 수 없는 고통의 분비물을 쏟아내는 매독성을 지닌 극약에 취하여 떠도는 탕아의 제물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난 혜원 씨를 사랑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어떤 책임도 질 수 없는 구제불능의 낙오자입니다.

이렇게 앉아 두 손을 모아 빕니다. 나를 사랑한다면 아니 동정한다면 제발 나를 잊고 당신의 갈 길을 찾아가 잘 살아주시오.

혜원이를 생각했다. 혁이 아주 어릴 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가면서 양가의 어른들이 며느리감이라고 사위감이라고 하고 농담삼아 뱉어 놓은 말이었다.

교육가며 기독교 가정에서 예의범절을 익히고 피아노며 그림공부도 하며 정서생활에 젖어 있어 다정다감하고 차분한 성격에 말수도 적어 현모양처 감이라고 교인들은 입을 모아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특등 며느리감을 골라놓았다고 혁의 어머니를 부러워하곤 했다.

게다가 은연중 혜원의 집에서는 혜원이가 고등학교를 마치면 곧 혁과 결혼식을 올리리라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나 혁은 혜원이가 싫다기보다는 결혼이란 자기 몫이 아니라는 생각에 혜원이는 교회에서 스치는 교우로 남는 기억의 한 사람일 뿐이었고 무엇보다 소중했던 것은 유학 가서 학위를 받고 63 빌딩보다 더 높은 건물을 지어보겠다고 하는 야망에 불타 있었을 뿐이었다.

그 후 혁이 한국에 다녀 갈 때마다 어머니가 혜원이와의 결혼을 서둘렀었으나 그 땐 이미 혁에게는 에스터라고 하는 금발 미녀에 아방궁의 권좌를 노리고 있었었다.

그렇듯 혁의 운명 밖으로 멀리 있으리라고 믿었던 혜원이가 탕아가 된 자신의 노리개가 되어 생명처럼 간직해오던 순결이 무참히 짓밟혀졌다.

생각하면 할수록 눈앞이 캄캄해 왔다.

야수같이 덤벼들어 씨근덕거리던 만행에 대한 책임은 과연 누가 져야 하는가?

처절하게 망가져 가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 뒤에 길게 드리워진 잿빛 그림자에서 혜원이의 가련한 모습을 보았다.

가련한 여인! 지금은 그 여인조차 외면해야 하는 탕아가 된 자신, 서로 사랑하여 결혼했고 아들을 낳았다고 하는 것이 무슨 죄인지 묻고 싶었다. 더더구나 모국을 위해 바치려고 목숨을 걸고 배웠던 기술이 벽을 문이라고 쳐 들고가는 고정관념에 쌓여있는 사회의 부조리로 버림을 받았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도 잃었다.

사면이 절벽이었다. 설사 그 절벽을 뛰어 넘는다고 해도 그렇게 하기 싫었다. 이미 혁의 건강은 세상을 등진 허수아비와도 같이 몸은 말라 비틀어져 있고 기억력도 쇠퇴해지고 가끔 정신착란증도 일으키곤했다.

무엇인가?

도대체 산다는 것은 무엇이며 살아 움직인다는 것은 무엇이며 죽는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혹자는 말했다. 산다는 것은 일종의 연소요 자기 소모라고 했다. 또 혹자는 산다는 것은 기다림이고 부귀와 영화, 명예와 권력이라고 하는 야망과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투쟁하는 어리석음을 배우는 연속이라고도 했다. 또 혹자는 망설이다가 놓치는 시간과 일, 행운과 불운을 번민하는 아픔의 세월을 타는 영원한 영혼의 흐름이라고도 했다. 좌절하고 통분하고 뾰족한 수도 없는 시계를 휘청거리며 절실한 현실을 배우면서 얻는다는 기쁨과 잃는다는 허무도 배우면서 경쟁하고 투쟁하며 아파하며 사랑하면서 끝내는 쓸쓸히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산다는 것이라고 하였다.

다시 요약해서 말하면 삶은 인생의 소풍놀이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제 그만 소풍놀이를 끝내고 싶었다.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죽음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혁은 이미 망가져 버린 정신과 육신을 내 던지고 삶과 죽음 사이로 배회하는 도망자가 되어 건전한 삶을 외면한 채, 죽음 속에서 살아나온 패배자의 쓰라림을 그만 살고 싶었다.

그립다. 외롭다. 보고 싶다. 안고 싶다고 하는 동물적인 욕망에 울분을 삼키던 세월도 모두가 헛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건조한 도시 속에서 위선과 구역질이 나는 가식의 냄새를 맡으며 황폐되어 가는 자신을 더 이상 구제 받을 수 있는 길은 사면을 둘러보아도 절벽일 뿐이었다.

인생은 짧은데 욕망에는 한계가 없다고 한다면 욕망의 탑을 쌓고 그 욕망이 절정에 달하면 그 고통은 두 배가 넘는다는 법칙을 아는 사람들은 과연 몇 사람이나 될까?

어리석은 사람들!!

평온하고 안온하였던 삶보다 좌절하고 번민하고 피 흘리고 아파하면서도 생을 사랑하고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안간힘을 쓰던 몸부림도 허사였다. 절규 절망 통곡 희한 등을 곱씹으며 흘러간 세월 속에 돌아보고 싶지 않은 시간들과 발자국, 그리고 그립던 얼굴 얼굴들도 모두가 기억 밖으로 멀리 멀리 떠 내버리고 싶었다.

모두가 다 거추장스럽고 악세사리 처럼 사치스러운, 산다는 것 자체가 사치스럽고 사랑도 행복도 모든 것들이 다 사치라고 생각했다.

또 다시 죽음을 생각했다. 죽음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더 중요하게 다가왔다. 어떻게 죽을 것이며 어디로 가서 죽을 것이며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 가도 생각했다.

아니 남길 것도 없고 세상을 향하여 첫 울음을 터트리며 태어났던 벌거숭이처럼 흔적 없이 그렇게 가고자 했다.

문득 생각나는 곳이 있었다.

에스터가 그렇게도 가고 싶어 했던 에스터의 고향, 어디인지는 확실히는 모르지만 동해안 어딘가에 있다는 작은 어촌, 어느 사이에 혁의 발걸음은 에스터가 태어났고 자라났을 것이라고 짐작되는 동해의 한 어촌에 발걸음이 멈추어 졌다. 어둠이 깔린 바다는 무서우리만치 고요했고 검푸른 파도는 푯말을 지으며 혁을 손짓하고 있었다.

먼저 신발을 벗어 던졌다. 그리곤 바다를 향하여 한 발 두 발 내딛는 혁의 발등위로 하얀 거품이 덮쳤다. 안경을 벗어 던지고 머리빗, 만년필, 분신처럼 가지고 다녔던 모든 소지품들을, 그리고 바지도 위통도 벗어 던졌다. 입는다는 것도 감정도 감각도 모두가 사치라고 외쳤던 혁의 흐린 안정에 에스터와 아들의 얼굴, 어머니와 매부 그리고 누님들의 얼굴, 얼굴들이 떠오르면서 혜원이가 자신을 향하여 안돼안돼 울부짖으며 달려오는 환상이 떠 올랐다. 모두가 악연이었다.

소리없이 두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굵은 눈물이 툭툭 소리를 내며 파도를 탔다. 혁의 몸은 서서히 넘실거리는 파도를 타고 아득히 멀어져 갔다. 다시 한번 사랑하고 63빌딩보다 더 큰 건물을 지어 보겠다고 하는 꿈은 영영 사라지는 것인가? ‘지지리도 못난 아주 못난 바보다.’ 결국 이렇게 아무런 흔적 없이,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가는 것을. 미련도 없이 가자고 했다. 살고 가는것이 인생의 무상함인 것을.

혁씨! 혁씨! 안돼 안돼요. 멀리서 들려오는 싸이렌 소리, 바다를 향해 달려오는 혜원의 모습이, 어머니와 매부 그리고 누이들의 모습이 파도 위로 넘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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