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가슴으로 대하기


아주 오랜만에 옛 친구인 S를 만나 토요일 오후를 즐겁게 보냈다. 풋풋한 봄처럼 아름다웠던 20대 초반에 만났으니 우리의 인연도 벌써 십 수 년이다. S는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가 방학 중에 나를 만나러 미국을 다녀간 후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내가 다녔던 이곳의 학교로 아예 옮겨 버렸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지금의 남편을 만났으니, 빙빙 돌아서 이야기 하자면 내가 그녀의 간접적인 중매쟁이가 된 셈이라고 우리는 만나면 옛 이야기를 하면서 웃곤 한다. 그러나 그렇게 오랜 세월의 친구인데도 강산이 몇 번 바뀌는 동안에 만난 것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다 보니 깊은 대화는 주고 받지 못하고 가벼운 일상의 대화만 주고 받는 사이가 된 것이 무척 아쉽기만 하다.

삶에 있어 친구가 주는 비중은 나이를 먹어갈수록 더 커진다고 한다. 친구가 많은 사람은 없는 사람보다 더 오래 산다는 통계가 있는 것을 보니 그만큼 삶에 생동감을 준다는 뜻 일 게다. 더구나 목숨처럼 귀한 친구가 우리에게 있다면 행복함을 덤으로 줄 것임에는 분명하다.

목숨과도 바꿀 정도로 귀한 친구에 대한 이야기로는 기원전 약 4세기 경에 살았던 피아시스란 그리스 사람 이야기가 유명하다. 이 사람은 큰 죄를 지어 교수형을 당하게 생겼는데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부모님을 만나 뵙게 해 달라고 왕에게 간청을 하였다. 그러나 왕은 쉽게 대답을 내리지 못했다. 효심은 이해하나 만약 허락을 하여 그가 도망이라도 간다면 국법의 위신이 흔들리기 때문이었다. 왕이 망서리자 피아시스의 친구인 다몬은 그는 꼭 돌아올 것이라고 말하며 만에 하나라도 그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친구를 잘못 둔 죄로 자신이 대신 교수형을 받겠다며 엎드려 빌었다. 왕은 다몬을 믿고 피아시스를 부모한테 보냈다. 그러나 교수형을 집행하는 날까지 피아시스는 돌아오지 않았고 드디어 정오가 되자 다몬은 그를 대신하여 교수대로 끌려나갔다. 많은 사람들은 어리석은 그들의 우정을 비웃으며 피아시스를 욕하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가 돌아오지 않자 다몬의 목에 굵은 밧줄이 걸리고 왕은 형 집행을 명령하였는데 시행 바로 직전에 혼신을 다해 말을 재촉하며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피아시스였다.

"폐하, 제가 돌아왔습니다. 그를 풀어주시고 저를 죽여주시옵소서" 두 사람은 깊은 포옹을 하며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나자며 석별의 정을 고했다. 두 사람의 아름다운 우정을 지켜본 왕은 "내 모든 것을 다 주더라도 저런 친구를 사귀어 보고 싶구나"라고 중얼거리며 그의 죄를 사면해 주었다 고 한다.

요즈음처럼 서로 경쟁과 시기가 난무하는 시대에 이런 일화처럼 자신보다 상대를 먼저 위하는 그런 친구가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가 말하는 친구란 가만히 들여다보면 오히려 친구를 가장한 적 일수도 있는 프레너미(Frenemy, 친구와 적을 합성한 신조어)를 친구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평소에는 상대를 위하고 이해하는 듯 하고 성공과 희노애락까지도 자기 일 인양 공유하는 척 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시기와 질투가 있는 것은 아닐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많은 친구들과 다방면으로 교제하면서 사귀는 것을 좋아하며 방대한 인적 교류를 자랑하기도 한다. 더구나 요즈음처럼 Face book이니 트위터니 블로그(Blog)의 세상에서는 마음만 먹으면 수 십 명, 혹은 수 백 명의 친구들을 사귈 수가 있다. "친구"하기를 클릭하면 금새 친구가 되고 맘에 안 들면 친구 목록에서 삭제해 버리면 된다. 그렇게 쉽게 사귄 친구를 진정한 친구라고 할 수 있을까? 나 같은 경우는 Face book 이니 트위터니 그런 것은 하지 않지만 사진과 글을 올리는 한국 블로그 사이트에서는 친구들을 몇 명 가지고 있다. 나는 그들의 글과 사진 보는 것을 좋아하고 새로운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그곳을 통해 얻기 때문에 종종 블로그에 들어가서 내 사진이나 글도 올리고 답글도 달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가상 공간에서의 친구 관계일 뿐, 클릭 하나로 친구라고 부르는 그 세계에서는 피아시스 같은 친구를 만난다는 것은 불행하게도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진정한 친구의 정의란 상대방의 마음을 사려 깊게 헤아려 주고 마음의 상처와 깊은 고독과 슬픔, 기쁨까지도 자신의 일처럼 나눌 수 있는 마음을 가져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과 더불어 시간까지도 할애할 수 있어야 한다. 카카오 톡이나 전화번호 리스트에 수백 명의 명단이 올라가 있어도 진정으로 위로를 받고 싶거나 마음의 감동을 같이 나눌 사람은 없기 때문에 편리함과 더불어 밀려드는 공허감은 어쩔 수 없다고 우리는 불평하지 않는가?

나 역시 그러한 공허감이 엄습할 때가 있지만 그래도 혼자서 나름대로 잘 놀고 혼자서 대화도 곧잘 하는 편이라서 그런 감정을 너끈히 극복해 나가는 편이다. 그런데 오늘처럼 장대비가 종일 내리고 온통 미친 바람이 불어대는 이런 날은 아늑한 커피 샾이나 빵집이라도 앉아 별 대화는 없어도 누군가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그럴만한 친구가 없음에 조금은 우울해 진 것이다. 언젠가 어느 분이 "리즈씨는 상냥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매우 차거운 것 아세요?라고 한 말을 떠 올리며 문득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가 떠 올랐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는가?

내가 진심으로 상대방의 입장에서 가슴을 열고 대화를 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는가 하는 자책감이 드는 것이었다. 오늘 같은 날, 수시로 밀려드는 허허로움 역시 내 탓이 아닌가 하고 나에게 묻고 싶은 것이다. <elkimsociet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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