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같은 친구


그래 우리 또 만나자.. 아프지 말고 잘 지내..

35년 이상 이어온 오랜 친구들 4명이 8년 만에 다시 만났다. 서울에서 2명 그리고 볼티모어 언니가 찾아와서 일주일을 여행도 하면서 같이 지내다가 모두들 훌쩍 떠나고 나니 모든 것이 텅 빈 듯 쓸쓸해 진다.

볼티모어에서 온 언니는 당시에 나의 직장 상사였지만 언니의 여린 심성 때문인지 12살의 나이차도 극복하고 친구처럼 지내던 사이었다. 내가 주말이 되어 그림을 그리러 덕소 등지로 나가면 그 언니도 이젤을 들고 나를 쫓아 같이 나가곤 하였다. 그렇게 그림을 그리기 좋아하던 언니가 이번에 직접 그린 그림이라고 매화를 곱게 쳐서 2점이나 액자에 표구를 해서 들고 왔다. 우스개 소리로 "예쁜 년은 여전히 예쁘다"고 70의 나이에도 여전히 고운 그녀의 얼굴을 보면 마음 편하게 살아온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은 마음 고생을 많이 한 그녀이다. 첫 남편과 이혼 후에 아들 둘을 데리고 먼 미국까지 와서 첫 사랑의 남자를 만나 다시 결혼은 하고 살았지만 총각이었던 그 분은 갑자기 들이닥친 남의 자식들과 어떻게 융화를 해야 하는지 몰라 무척이나 서툴렀다고 한다. 깔끔하게 먼지 하나 남기지 않고 지내다가 10대 남자 둘이 온통 집안을 어지럽히니 눈만 뜨면 잔소리고 더구나 남의 자식 둘이나 데리고 들어온 며느리가 미운 시어머니의 구박 역시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몇 년을 지내다 새 아버지와의 사이가 좋아질 무렵 큰아들이 대학교 2학년 때 교통사고를 당해 26년째 전신 불구로 병원에 누워 지내니 이 언니의 인생은 그야말로 눈물 인생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비록 혼자 몸으로는 수저 하나 들 수 없는 아들이지만 살아서 숨을 쉬고 있다는 것 만으로도 고마워 언니는 이제 그 불행조차도 감사로 받아들이기에 나 역시 감사하다. 그 아들 역시 남들보다 천 배 만 배의 노력으로 경희 사이버 대학 문예 창작학과를 졸업하고 이제 신학대학원에 다니면서 하루하루를 기적의 마음으로 살고 있다니 참으로 놀라울 뿐이다.

그런데 하필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한 숙이는 일주일 내내 비만 보고 갔으니 늘 어두운 그녀의 표정처럼 날씨도 궂었다고 우리는 속상해 했다.

사람들은 암만 행복해 보여도 가슴 속 한군데는 누구나 외롭고 슬픈 섬 하나쯤 떠 있듯이 늘 조용하고 말이 없는 이 친구의 가슴속에는 그런 섬이 한 100개쯤은 떠 있을 법한데도 물어보기 전까지는 도통 그런 마음을 표현을 하지 않아 더욱 안쓰러운 친구이다.

60이 다 되어가는 나이가 되도록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채 직장을 다니면서 홀로 부모님을 모시고 살다가 3년 전에 엄마가 돌아가셨다. 그리고 이제는 약간의 치매기가 있으신 아버지를 목욕도 시켜드리고 병원을 모시고 다니며 살아 가고 있는 효녀 숙이를 보면 늘 가슴이 찡한 것이다. 동생이 2명이나 있지만 그 누구 하나 시간과 물질을 내어 선뜻 아버지를 돌보려 하지 않는다.

"아프신 아버지 모시고 사는 것이 너무 힘들지"? 하고 물어보면.. "견딜만 해. 그리고 그냥 아무 생각 안하고 살기로 했어. 만약에 내 머리 속에 생각이 많으면 내 삶이 너무 힘들어질 것 같아서".. 하며 쓸쓸한 미소를 짓는 그녀를 꼭 안아주고 싶었다.

비가 모처럼 조금만 내리는 날 우리는 John Muir Redwood Park에 갔었다. 나는 .

가끔 우울해지면 집에서 가까운 이곳으로 혼자 달려와 숲 속에 앉아 있다 가곤 한다.

가끔 그냥 저냥 나이만 먹어가며 세월을 허비하는 것 같은 허탈함에 빠질 때 이곳에 앉아서 안개 속에서 품어져 나오는 젖은 낙엽 내음을 맡으면 참 편안해 지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만나도 연륜 탓인지 친구들이 저 레드우드 나무들처럼 느껴졌다. 언제나 그 자리에 서서 변함이 없는 나무 같은 친구들이 좋은 것이다. 그런 사람인 경선이란 친구는 자식이 없는 나와 숙을 보면 괜히 안쓰러운지 잘 성장해준 그녀의 아이들 자랑을 아껴 하는 쓸데없는 배려를 너무 잘해서 탈이긴 하지만 말이다.

나는 결혼 후 임신을 한 적이 있었으나 약한 체질 탓인지 입덧 한 두 번 해보고 바로 태아가 유산이 되고 말았다. 보기에는 별로 약해 보이는 편은 아니지만 나는 태어나자 마자 탯줄이 느슨해져 온 몸의 피를 다 쏟아 큰 병원으로 달려가 엄마 피를 수혈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그렇게 살아난 나는 그런대로 현재까지 큰 병 없이 살아오고 있지만 그때의 영향으로 어릴 적에는 잔 병 치레를 많이 하였다. 자식이 없어도 한 번도 불행하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었지만 나이가 먹어가니 귀한 자식 한 번도 안겨주지 못한 남편한테 정말로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겉으로는 표현을 해 본적이 없지만 자상한 성격의 남편한테 만약 자식이 있었다면 누구보다도 좋은 아버지가 되었음이 분명 할 텐데 말이다.

친구들이 방문한 일주일 내내 단 하루도 비가 내리지 않은 날이 없다 보니 이곳 저곳 많은 곳을 가보지 못하고 대신 커피 샾에 앉아 우리들의 가슴속에 떠 다니는 외로운 섬을 방문해서 그들의 고독을 달래주기도 하며 꺼내기 힘들었던 아픈 기억들도 스스럼 없이 털어놓기도 했던 아름다운 시간들.... 지나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에 일주일의 시간이 내게 고마웠던 것처럼 비록 짧은 여행에 비 때문에 많은 곳을 둘러보지 못한 그녀들도 좋은 추억을 담고 돌아갔는지 모르겠다.

친구들아 이제는 자주 만나서 얼굴을 보도록 하자.(elkimsociety@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