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의 초상화


<베이포럼>

지난주 샌프란시스코 프레시디오 오피스 클럽 갤러리에서 제2차 대전 중 미국 거주한 일본인 집단 강제 수용을 재조명하는 사진전 전시회가 열렸다. 사건의 발단은1941년 12월 7일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에 있는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폭격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 개전 후3개월이 지난 1942년 2월 19일 루즈벨트 대통령은 ‘대통령령 9076호’를 발령했다. 일본계 미국인들의 시민권을 유보하고 전쟁 기간 동안 군사적 제한구역을 지정해 미국에 대한 배신행위나 불순한 의도가 입증되지 않더라도 누구든 추방할 수 있는 모든 권한을 육군 장관에게 준 것이다. 그해 3월21일 의회는 일본계 미국인들을 서부 해안지역에서 추방할 수 있도록 인가하는 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죄 없는 적성국 일본계 미국인 11만 명이 영장이나 심문 없이 체포돼 재산을 몰수당하고 미국 내 10개의 격리수용소에서 3년 동안 억류당했다. 서부지역에 살던 일본인들을 애리조나, 아칸소, 콜로라도, 아이다호, 유타, 와이오밍주 등 중부지역의 수용소로 이동시키고 일부는 캘리포니아주의 수용소에 구금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프리시디오에 육군 서부지역방위본부(4군단)가 주둔하고 있었다. 아이로니하게 강제수용을 전후해 일본계 미국인들의 태업 또는 간첩행위가 입증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강제수용소 생활 적성국 국민으로 분류된 일본계 미국인들은 1세, 2세 가릴 것 없이 캘리포니아 내륙, 민가에서 멀리 떨어진 황야나 사막 지대의 ‘재정착 수용소’에 강제로 격리되었다. 높은 철조망에 둘러싸인 수용소 주변은 무장 군인들이 탈출을 막기 위하여 밤낮을 지켰다. 이런 수용소가 캘리포니아와 네바다 등 서부 지역에 열 군데나 지어졌으며, 강제로 억류된 일본인들은 10만 명이 넘었다. 수용소의 생활은 혹독하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어려움을 참아야 했다. 시설은 열악하고 불편하였다. 간이침대, 담요 몇 장, 간단한 식기구 그리고 천장에 달린 전구 하나가 그들에게 지급된 물품의 전부였다. 기름종이를 둘러 비바람을 막은 막사에선 한 방에 여러 가족이 서로 등을 비비며 지내야 했다. 하수도나 화장실 시설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다. 음식 또한 수준 이하였다. 최소한의 의료 진료만이 제공되었다. 사실상 수용소의 시설은 감옥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강제 수용소에 감금된 일본인들은 3분의 2 이상이 미국 시민권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들 중 많은 수는 어린이였다.

수용자들은 철저하게 감금되어 살았으며, 몇몇 가족들은 강제로 서로 떨어져야만 했어요.

악조건과 스트레스로 인한 병으로 사망자가 속출했다. 후일 적지 않은 일본인이 일본 본토로 돌아가는 상황이 지속됐다. 대통령의 사과

수용소 생활을 시작하기전 많은 일본계들이 거리로 나와 피켓을 들고 일본의 제국주의를 비난하며 전쟁을 멈출 것을 요구하는 시위에 참가하는데 전체의 80%가 미국에서 태어난 2세와 3세들이었다 한다. 또 어떤 이들은 군에 입대하여(미 군 당국이 입대를 허락한 이는 소수였다) 일본을 상대로 한 전쟁에 참여하기도 하는데 이는 미국에 대한 충성심을 보이려는 대표적인 사례들이었다 볼 수 있다. 일본계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집단 수용은 강행되었다. 3년이 지난 1945년 1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강제수용 조치는 인종차별에서 비롯되었다는 대법원의 위헌 판결로 끝이 나게 된다. 대통령령은 1945년 1월에 폐지되었다.

이후 40여 년간 일본 정부와 강제 수용 피해자들은 미국의 사과와 배상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미국 정부의 공식 사과가 있기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미 의회는 일본인 희생자들에 대한 대통령의 사과와 배상금을 결정해 사건을 마무리 짓게 되었다. 1988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수용자 중 살아 남은 이들에게 각각2만 달러를 보상해 주겠다는 법령에 서명했다. 미국 정부는 1990년 공식으로 사과하고 개인당 2만 달러씩 보상해 총 16억 달러를 배상금으로 지급했다.

대통령의 사과와 함께 배상금을 받기까지 일본인이 미국정부를 상대로 제2차세계대전 중 수용소 구금을 반대한 소송에서 충격적인 승리를 했다. 당시 소수계가 예상치 못한 승리로 미국을 상대로한 일본 정부와 일본계 미국인들의 노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가늠하는 척도였다. 제2차 대전 중 불법 미국 거주 일본인 집단 강제 수용 사건은 철저한 인종차별적인 행위였다. 법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는 미국의 법치주의에 정면 배치되는 미국내 소수민족에게 자행된 핍박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건으로 미국인들의 동양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 주는 인권유린의 대표적인 증거였다. 일본은? 일본은 3년 동안 자신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구금하고 인권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미국정부를 상대로 대통령의 사과와 배상을 받아냈다. 반면 일본은 36년 동안 약탈과 인권을 침해한 한국에 대해선 국제사회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하고 한국정부의 경제적 어려움을 이용해 그저 보상하는 융내만 냈던 것이다. 특별히 일본군 위안부 20만명에 대한 진정한 사과와 보상을 아직도 미적거리고 있다. 박근혜 정권에서 타결한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보상이 한국 국민들의 공감을 못 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제사회에서 인권은 가장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권리 아니겠나. 일본계는 그들의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는데 지속적인 노력을 펼쳐 올해로 75주년을 맞이하여 일본인 집단 강제 수용을 재조명하는 사진전 전시회를 일본인의 초상화를 그린 것이다. 우리도 장인환 전명운 의사의 의거를 다시 검토할 필요성이 있다. <hdnewsusa@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