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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과 동족을 위한 사랑의 봉사자”


SF 한인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 주최, 강사에 이종혁 위원

11일, 위대한 지도자 이대위 목사 강연회 열려

“20세기 초반 샌프란시스코 지역에서 독립운동가요 언론인으로 목사로서 바쁘게 활동하면서도 한국에서 온 초기이민자와 유학생들을 위해 기도와 사랑으로 봉사하다 끝내 과로로 건강을 잃고 50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대위 목사는 그동안 크게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의 종이자 위대한 지도자였다” 지난 11일 SF한인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정은경) 주최로 밀피타스 뉴비전교회에서 열린 강연회 ‘위대한 지도자 이대위 목사’는 이종혁 위원이 이 지역 초기 이민 선조이자 위대한 지도자였던 이 목사의 업적에 대해 강의했다. 이정현 위원의 사회로 진행된 강연회에 앞서 이성도 영사와 김진덕정경식 재단의 김한일 대표, 릭성 산타클라라 쉐리프 부국장의 축사가 있었다. 이성도 영사는 축사에서 “이지역에 아직까지 파묻혀 있는 위대한 선조들의 역사적 발자취를 찾아 나서야 한다”면서 “일제 강점기 시대 당시 근로자 하루 임금이 경우 60센트였는데 그중 50%를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을 만큼 우리의 선조들은 독립운동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는 기록이 계속 발굴되고 있다”는 비화를 소개했다. 이어서 김한일 대표는 “ 샌프란시스코에 세워진 위안부 기념비는 미국내에서 8번째이며 한국과 중국을 포함한 13개 커뮤니티가 함께 참여해 인신매매를 근절 시켜야 한다는 새로운 역사를 썼다”며 “일본 정부는 지원금을 빌미로 유엔산하 유네스코에 압력을 가해 일본군위안부 기록물 등재를 막고 있다”고 비난했다.

릭 성 산타클라라 카운티 쉐리프 부국장은 “우리의 이민 선배들 가운데 이대위 목사 같은 위대한 지도자의 업적과 발자취를 뒤돌아 보는 뜻깊은 기회가 되었다”면서 이종혁 강사에게 강사장을 증정했다. 피아노, 바이올린, 플룻 삼중주(홍슬기, 이경진, 이은영)가 ‘내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오빠생각’을 연주했다. 뉴비젼 한국학교 어린들이 예쁜 한복을 입고 ‘과수원길’ ‘아리랑’을 불러 큰 박수를 받았다. 이어서 강연으로 이어졌다.

1903년에 도미

이종혁 위원은 “이대위목사는 1878년 평남 강서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는 한학을 공부했고 그 후 미국선교사들이 세운 숭실 중학교를 다녔는데 그곳에서 근대학문과 기독교를 배우게 되었다”면서 “그가 미국유학길에 오른 것이 1903년 그의 나이 25세 때였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오레곤 주에 있는 포틀랜드 아카데미 대학준비과정을 마친 그는 버클리대학에 입학하여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하면서 그의 뛰어난 영어실력으로 민족공동체와 신앙공동체를 위해 봉사하기 시작했다”고 덧 붙였다. 이대위 목사는 하나님 사랑이 조국 사랑과 통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조국광복의 최선의 길’이라고 믿고 1906년 12월 샌프란시스코 한인감리교회 창립에 참여하여 선교운동과 민족운동을 병행하였다. 그는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방법으로 민족공동체를 이끌어 갈 지도자와 선교사 양성에 큰 힘을 쏟고 한국사람들에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한인 최초 버클리대학 입학 이종혁 강사는 “1913년에 한인최초로 버클리 대학에서 사회학 학사학위를 받은 그는 1918년에야 샌프란시스코 신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미국 남감리교회에서 정식으로 목사안수를 받았다”며 “샌프란시스코 감리교회의 주보 ‘대도’를 통하여 복음전도 뿐 아니라 동포들의 교양증진 및 본국과 세계각국의 정세를 알리는데 노력하였으며 샌프란시스코 교회를 중심으로 인근 지역에 여러 한인교회들을 설립하고 부흥시킴으로 미국남감리교회 안에 한인교회 지방회를 조직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밝혔다. 1909년 2월에는 <대한인국민회> 창립을 주도했으며 1910년 1월에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부회장에 선임되어 총회장 황사용과 함께 국민회 기초를 다졌을 뿐 아니라 1913년부터 1918년까지 북미지방총회 회장을 세 번이나 연임하면서 국민회를 정식인가를 받은 사단법인으로 자리를 굳혔을뿐 아니라 미 국무장관으로부터 국민회가 한국인들을 위한 공식기구로 인정한다는 약속을 받아 나라 잃은 한인들의 3권 분립 가정부(假政府)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그는 ‘인터타입 한글식자기’를 발명하여 신문 활자 혁명을 일으켰으며 이 식자기는 교회주보 ‘대도’와 ‘신한민보’를 찍어 국내외 정세와 독립운동 소식을 전했다. 그는 주필로 수많은 글들을 직접 쓰며 참여하였다. 이 강사는 “당시 신한민보는 북가주 지역 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국제정세 등 다양한 소식을 전해 1908년 3월 일본제국의 앞잡이 더럼 스티븐슨 당시 대한제국 외교 고문을 저격한 장명환 전명운 열사의 저격뉴스가 해외에 알려져 1909년 10월 안근중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총독 저격과 1932년 윤봉길 의사가 흉커우 공원에서 일본 요인을 저격하기 위한 폭탄 투척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의견도 제시했다.

민족운동 지도자로

1910년대부터 20년대까지 샌프란시스코에서 이 목사의 도움을 받지 않은 한인은 없을것이라 말할 정도로 낯선 땅에 도착한 한국인을 제일 먼저 영접하고, 교포가 이민국에서 문제가 생겼다하면 제일 먼저 달려가고, 일자리와 아파트를 얻어주는 것은 물론 사진 한장 들고 온 신부들을 결혼하도록 주선해주고 결혼 주례까지 서주는 한편 교포사회의 대소사를 챙기던 이 목사는 미주 한인사회 전체를 이끌어간 재미 민족운동의 실질적인 지도자였으며 ‘민족목회와 민족운동’의 중심에 서서 1928년 50세에 생애를 마쳤다. 이 강사는 “위대한 지도자 이대위 목사가 그의 업적을 후손에게 전달하지 못한 아쉬움이 크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으며 2005년에는 이대위 지사 천장위원회(위원장 문충한)를 구성하고 그의 유해를 한국의 국립묘지로 이장하였다”고 전했다. 이어서 “아직도 우리의 주위에는 조국 광복을 위해 일했던 알려지지 않은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는데 아직 발굴되지 못해 그대로 묻혀 있다”면서 “이제라도 후손에게 올바른 민족 이민역사를 전달하기 위해 독립운동가와 지도자 발굴을 박물관 추진위 같은 단체에서 진행 했으면 좋겠다”는 당부를 했다. 사진전시회도 열려 이대위 목사의 유해는 그가 그처럼 그리고 사랑하던 고국 땅에 묻혀 있으나 싸이프러스 공원묘지에 있는 그분의 옛 무덤 자리와 묘비는 그대로 보존하게 되었다. 행사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시인 박은희씨가 염천석 시인의 헌정시 ‘큰 별로 빛나리’를 낭독했다. ‘초기 이민인물 만나기’ 시리즈 중 두번째였던 이날 강연회에서는 정 윤 박사, 황규빈 대표, 최문호 씨 등의 초기 인물 영상인터뷰도 상영되었으며 사진 전시회도 열렸다.

<헌정시>

큰 별로 빛나리

시인: 염천석

검은 손에 빼앗긴 내 나라

하늘은 짙은 먹구름으로 가리워

빛줄기 하나 없는 거리거리

칼날 같은 말씀으로 불 지피셨네

아, 여기

거칠고 험한 바다 건너

이 거대한 대륙을 두루두루 헤매며

겨레의 혼 불을 심으셨네

한 손에는 성경책

또 한 팔에는 불타는 지팡이

겨레여, 조국이여 영원하거라

나라 빼앗긴 이 설움

차라리 밀물처럼 마구 밀려오는

속으로 목 메인 울음소리 아니었던가

저 깊은 하늘에

태양이 걸려 있는 한

저렇게 자유하는 푸른 독수리의 날개

누가 꺾을 수 있을까

그 눈물 그 나라 사랑 그 말씀

끝내는 반 백 년 긴 세월

그 질기고 모진 쇠사슬 끊고

골마다 들마다 온 지구촌 구석구석

땅 속에 흐르는 정갈한 찬 물로

말갛고 깨끗하게 씻어낸 얼굴

찬란한 여백을 여는 큰 별로 빛나소서

영원토록 이 겨레와 함께...

사진: 행사 직후 축사를 한 귀빈들을 포함해 잠시 포즈를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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