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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랗게 반짝이는 그 불꽃을 보라


생태학적인 시를 쓰는 시인들은 참으로 많다. 그들은 문명이 지구를 파괴하고 오존의 위험을 경고한다. 나날이 파괴되어가는 지구의 생태에 분노를 느끼며 그러한 분노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표출한다. 나 역시 자연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지고 내 주변의 자잘한 일상보다는 조금 딱딱하지만 자연으로부터 글감을 받고 글을 쓰곤 한다.

비록 목소리가 작지만 나름대로 생태계의 위협에 대해 자분자분 내 분노를 표출하기도 하고 또한 자연의 신비에 대해 시를 쓰고 산문을 쓴다. 오세영 시인의

많은 시들은 직설 대신에 우회적인 방법으로 부드럽고 동요처럼 시를 쓴다. 그의 시집 <밤 하늘의 바둑판>의 첫 페이지 시인의 말처럼 자본주의 가치관에 물든 이 시대에 그는 순진하고, 미련하고, 낡은 시인일지도 모른다고 하였듯이 그는 우직하도록 자연의 파괴에 대한 우려를 절제되고 깊은 철학적 사유로 풀어낸다. 가끔 외국 영화를 보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옥수수 밭이나 미로처럼 만들어진 정원에 갇혀서 출구를 못 찾아 헤매는 장면을 볼 수가 있다. 그들 앞에 펼쳐진 것은 좁은 시야의 옥수수 밭이거나 이리저리 꺾여진 미로의 정원일 뿐이다. 그러나 만약에 높은 곳에서 그 곳을 바라보았다면 옥수수 밭의 끝이 어디인지 정원의 출구는 어디인지 알 수가 있듯이 오세영 시인은 나무를 보되 숲을 보지 못하는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있다. 더구나 오세영 시인은 아예 지구를 지구 위에서 내려다 보는 부감법에 의해 그의 많은 시의 미학이 펼쳐져 있다. 즉 부감법이란 평면적인 시야가 아니라 전체적인 시야로 모든 사물을 해석하듯이 활연관통의 지점에 다다랐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시집 제목이 왜 "밤 하늘의 바둑판'일까? 그것은 바둑판처럼 그의 마음에는 모든 것이 다 보여지는 것일게다. 의사가 환자를 수술대에 놓고 시술을 할 때 육체의 전체적인 맥락을 놓친 채 아픈 부분만 절개를 하거나 봉합을 할 수 없듯이 오세영은 전체를 보되 전체를 압축하고 간결한 언어로 묶을 수 있는 시인이다.

해머 Hammer

홀로 있다는 것은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아니

없다는 것이다.

언덕에 쳐박힌 바위,

홀로 길가에 버려진 돌멩이,

어디 그들을 살아 있다 하겠는가.

생명은 항상 누군가와 만나서

부딪히고, 깨지고, 합치고, 나뉘고, 열 받아야

생명이다.

한 자리만을 지키는 나무나 꽃도 기실

바람에 흔들리고 벌이 핥아

살아 있는 것.

아무 만남 없이 홀로 시간을 죽이는 인간보다는

부딪히는 두 개의 돌멩이가 더 의미 있나니

해머가 내리치는 정釘에 맞아

한 순간 반동하는 바위의 강한

힘,

파아랗게 번쩍이는 그

불꽃을 보라.

시 해머(Hammer)는 <밤하늘의 바둑판> 제4부 ‘아하!’에 실린 시이다. 해머가 무엇인가? 대개 큰 바위를 작은 크기로 쪼갤 때 그 자체로 내려치거나 정을 꽂는 무겁고 큰 망치이다.

‘홀로, 언덕, 바위, 길가, 돌멩이, 생명, 꽃, 벌, 해머, 정, 불꽃’의 시어를 가진 이 시에서 화자는 홀로 라는 원천적인 고독의 의미에서 일탈하여 함께 공존함으로써 더욱 커다란 의미를 갖는 대상들을 바라보고 있다. 보이는 것은 모두 제각기 혼자, 홀로인 것 같지만 ‘언덕에 처박힌 바위’, ‘길가에 버려진 돌멩이’, ‘꽃과 벌’, ‘정과 바위’ 등 이같이 끊임없이 무엇인가와 합체되어 나타나는 동반 대상들을 그냥 지나쳐 바라보지 않았다. 의미있는 삶이란 <아무 만남 없이 홀로 시간을 죽이는 인간보다는 부딪히는 두 개의 돌맹이가 더 의미있나니> 했듯이 부딪히고, 깨지고, 합치고, 나뉘며 종횡, 연합하는 것이 바로 유기적 생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시인은 <파아랗게 번쩍이는 그/불꽃을 보라.> 한다. <파아랗게/번쩍이는/불꽃/>등 모든 단어와 문장에서 느끼듯이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강한 의지를 시인을 말하고자 한다.

홀로 있다는 것은/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아나/ 없다는 것이다.’ 세상 만물이 모두 저 혼자 존재하는 것 같지만 그 존재의 상승은 또 다른 존재와 나란히 함으로써 비로서 살아 있는 유기체가 되고

생명의 가치가 된다. ‘

‘어디 그들을 살아 있다 하겠는가’ 하고 반 물음을 던지지만 기실 모두 살아 있음에 하나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겠다는 우주적 시점이요 초월적 관점이다.

세상에 그 한 개체로서 완전한 사물은 없다. <생명은 항상 누군가와 만나서> 그 하나가 존재하기 위해 다른 사물과 긴밀한 유대 관계를 가지며 유기 또는 협동하거나 대등하게 역할을 분담한다. 그럼으로서 ‘살아있는 것’의 가치가 주어지고 의미가 더 한층 부여되는 것이다. 친구와 친구 사이에 오해가 생겨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다 할 지라도 다르게 생각하자면 그것 역시 살아있음에 대한 찬란한 증거일 것이다.

<파아랗게 번쩍이는 그/불꽃을 보라.> 불꽃이 지향하는 바는 무엇인가? 곧 없어질 찰나의 불꽃이라도 그 불꽃이 지닌 의미를 놓치지 않는다면 유한적 삶의 엄숙함을 보아야 할 것이요, 정을 내려침으로 해서 <한순간 반동하는> 삶의 꿈틀거림이 아름답지 않는가

우리가 주어진 삶을 살아갈 적에 수도 없이 많은 순간을 허무감에, 존재가치에 대한 우울함으로 자신의 자존감을 스스로 낮추기도 한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듯이 때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자존감이 떨어질 때도 있다.

그러나 오세영 시인의 "해머"란 시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인은 해머가 내려쳐지는 그 순간, 해머의 물리적인 동작보다는 그 해머 자루의 끝에서 사물을 바라보며 반어적인 명제를 외치고 있다. 그러므로 생명이란 주어진 시간에서 허비하는 것이 아니라 돌멩이가 돌멩이끼리 부딪히며 섬광을 밝혀내는 것처럼 한 순간도 의미 없는 시간이란 있을 수 없다는 생명 외경의 태도를 견지한다. 창작의 모티브는 멀리 있지 않고 길가에 쳐박힌 돌멩이에게서 발견하고 또한 단순히 창작의 모티브만 발견해 내는 것이 아니라 그로인해 살아 있음과 희로애락 인생사를 발견해 내는 것, 과히 이 시인의 놀라운 성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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