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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불꽃을 점화한 재미 한인의 선구활동


(제2회)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대한인국민회의 국제회의 대표 파견 추진

제1차 세계대전이 1918년 11월 11일 마침내 종전이 선언되자 국제사회는 향후 있을 파리강화회의에 모든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윌슨 대통령의 14개조 평화조건이 어떻게 이행되고 적용될 것인가는 승전국 연합국이나 패전국은 물론 전 세계 약소 민족 국가들에게도 초미의 관심사였다. 이미 14개조 평화조건에 따라 폴란드의 독립은 확정되었고 1918년 6월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체코슬로바키아는 연합국의 승인을 받았다.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 정부를 건설하였고 아일랜드, 인도 등 약소 민족들은 독립국가 수립을 요구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다음날인 11월 12일 뉴욕의 김헌식은 북미지방총회장 이대위에게 향후 있을 제2차 뉴욕 소약국민동맹회의에 대표 파견을 논의하자고 제의했다. 이러한 제의에 이대위는 즉각 중앙총회장 안창호에게 공문을 보내 외교는 북미지방총회가 담당할 사항이 아니니 중앙총회에서 조치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대위 · 안창호의 한인대표 파견 추진

이대위는 11월 14일 특별 임원회를 개최해 윌슨 대통령에게 민주주의의 승리를 축하하는 전보를 보낼 것과, 중앙총회의 지휘 하에 특별 의연금 모금활동을 추진하기로 의결했다. 그리고 각 지방회에 의결 결과를 담은 「통첩」(1918.11.15)을 보내 협조를 당부했다. 이 「통첩」에서 그는 “이번 대전쟁에 연합국과 미국의 승리는 곧 윌슨 대통령의 민주주의 승리니 세계 각 민족은 모두 자기 의향에 의지하여 그 운명을 결단하는 동시 자유를 얻는 민족이 많을 것이라” 하고 국제정세가 급변하는 이 좋은 때를 이용해 소약국민동맹회의와 장래 파리강화회의까지 우리의 활동을 시험해 보자고 요청했다.

이대위는 11월 15일 중앙총회장 안창호에게 다시 공문을 보내 소약국민동맹회의와 파리강화회의를 대비하여 한인 대표자를 파견하자고 공식 제안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11월 16일 북미지방총회장의 이름으로 윌슨 대통령에게 승전 축하 전보를 보냈다. 11월 20일에는 뉴욕 소약국민동맹회 회장에 서신을 보내 가능한 빨리 우리 대표를 파견할 터이니 대회 일정을 알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같은 북미지방총회의 조치는 1917년 당시와 다른 매우 기민한 행동이었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는 이대위의 공문을 받은 직후 11월 18일 가장 먼저 정한경에게 서신을 보내 시국 현안에 대한 자문과 협조를 구했다. “제 생각에는 우리가 윌슨 대통령에게 교섭을 함으로 오늘 무슨 효험이 없을 줄 아오나 세상 사람들이 자기들의 자유와 평등을 위하여 말하는 이 때에 우리만 가만히 있으면 독립을 원치 아니하는 이와 같을 지라. 우리의 뜻을 발표하는 것은 가하는 듯하오이다. 형께서 이에 대하여 의견을 말씀하여 주소서.” 그런 후 이번 국제회의에 정한경을 대표로 파견하고 싶다하고 소약국국민동맹회가 어떤 단체인지 물었다. 이미 안창호의 마음에는 정한경을 이번 국제회의의 대표로 점찍고 그 의향을 물은 것이었다.

정한경(1891∼1985)은 어떤 인물인가. 1909년 6월 박용만이 만든 헤스팅스 한인소년병학교에 참가해 일찍이 상무주의 독립정신을 갖추었고 네브라스카주 커니사범학교와 주립대학교를 졸업(1917)하고 노스웨스턴대학교 경제학과 조교로 재직 중에 있었다. 그는 1915년 2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개막된 만국박람회에 구경 와서 일장 연설로 주변을 놀라게 했는데 이 때 처음 안창호를 만난바 있었다. 네브라스카에서 공부할 때 한인학생동맹 회장으로 활동하였고 중국인 유학생 잡지 The Chinese Students Monthly에 기고하는 등 뛰어난 언변과 대외 활동 능력을 갖추었다. 또 그는 대전 종결이 선언된 1918년 11월 11일 재미 한인 동포들을 향해 장문의 영문 편지를 보내 이 때를 기회로 우리 한인 대표자를 뽑아 대비할 것을 가장 먼저 촉구하였다. 이 편지에서 그는 영어 구사력과 탁월한 지식을 소유한 이승만을 한인 대표자로 추천하였다. 따라서 안창호가 가장 먼저 젊은 정한경에게 시국문제를 협의하고 대표로 천거한 것은 그만한 자질을 갖춘 인물로 본 때문이었다.

파리강화회의 한인대표로 정한경 · 이승만을 선출

안창호는 1918년 11월 2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시국문제 논의를 위한 중앙총회 임시협의회를 개최했다. 이 때 북미지방총회 임원들을 비롯해 유지 인사 등 20여 명이 참석했다. 임시협의회는 “파리강화회의와 및 소약국민동맹회의에 한인 대표자 파견은 아 대한인 전체 민족의 대사건”으로 간주하고 7가지를 의결하였다. 주요 의결 사항은 중앙총회에서 모든 일을 총괄하며 이승만, 민찬호, 정한경 3명을 한인 대표자로 선택해 소약국민동맹회의에 참가시키고 정한경은 파리강화회의 대표자로 선정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결 내용을 하와이지방총회에 보내자 총회장 안현경은 중앙총회의 결정에 찬성하며 경비를 어떻게 할 것인지 알려달라고 답신(1918.12.5)했다.

북미지방총회는 중앙총회의 의결사항을 11월 26일 「특별포고문」으로 만들어 󰡔신한민보󰡕 11월 28일자 호외로 알렸다. 호외에서 “이번 평화회의는 세계 각 소약국 민족이 윌슨 대통령의 전쟁 목적의 성공에 의지하여 자유 회복을 도모하는 때니 이것이 실로 우리 민족의 만나기 어려운 큰 기회라. 그런 고로 일반 동포는 평화회와 소약국민동맹회에 한인 대표자 파견을 창도하는 바 나중 성공은 공리와 운명에 붙이려니와 오늘 진행은 우리 민족의 성력의 통일에 있는 것이라”하고 전 미주 한인의 적극적인 성원을 촉구하였다.

1918년 12월 14일부터 15일까지 이틀간 뉴욕에서 열리는 소약국민동맹회의는 1917년에 이은 두 번째 국제회의였다. 한인 대표로 선발된 민찬호와 정한경은 중앙총회의 결의에 따라 바로 뉴욕을 향해 출발하였고 이승만은 하와이 이민국의 허가가 제 때 나오지 않아 출발이 늦어졌으나 안창호에게 보낸 답전(1918.12.2)에서 곧 미국으로 건너갈 것이라고 회신했다.

그런데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왜 정한경 한 사람만 선임하고 이승만 같은 인물을 대표자로 뽑지 않았는가에 대한 문의가 대한인국민회로 쏟아졌다. 북미지방총회는 이런 사실을 들어 중앙총회에 시국문제를 전담할 임시위원회를 구성할 것과 파리강화회의 대표자 추가 선정 논의를 제안하였다. 제안을 받은 안창호는 12월 23일 임시협의회를 개최해 7인(임정구, 황사선, 최진하, 최응선, 이건영, 송창균, 홍언)의 임시위원회를 조직했다. 상항(S.F.)지방회장 이건영은 곧 중앙총회장 부회장 백일규로 대체되었지만 7인의 임시위원회는 그 다음날 24일 이승만을 파리강화회의 대표자로 추가 선정하기로 의결했다. 또 1919년 1월 4일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 등 시국문제 협의를 위한 전체 한인 대표 회의로 임시국민대회를 열기로 의결했다. 이로써 파리강화회의 대표자 선정문제를 매듭지은 중앙총회는 대표자 파견을 돕기 위한 특별의연금 모금활동에 전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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