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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불꽃을 점화한 재미 한인의 선구활동


3・1운동과 재미 한인의 독립운동 (제3회)

뉴욕 신한회의 결성과 독립청원 외교활동

제1차 세계대전 종결 직후 가장 빨리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응한 곳은 뉴욕의 한인들이었다. 뉴욕은 미국 서부지역에 비해 한인들의 수가 적었고 재미 한인사회의 중심된 활동지역도 아니었다. 1910년대 말까지 뉴욕 내 한인들의 수는 주변 인근 지역을 포함해 30~40명 정도였다.

1910년대 뉴욕에서 활동한 주요 인물로는 1896년 미국에 온 김헌식, 1900년 의친왕 이강이 미국 유학갈 때 수행원으로 따라 온 신성구, 1902년 유학차 미국에 온 이원익, 1907년부터 뉴욕에 정착해 대한인국민회 회원이자 흥사단원으로 활동한 천세헌 등이다. 그 밖에 안정수·이원익·황용성·서필순·김승제·차두환·안규선·이봉수·장수영·박호빈·조병옥·임초 등이 있었다.

뉴욕은 1907년 9월 한인공제회가 설립되어 활동했던 곳이다. 그런데 1919년 3월 29일 한인공동회를 통해 처음으로 대한인국민회 뉴욕지방회(초대 회장 천세헌)가 설립되기까지 미국 동부에 위치한 지역적 특성 때문에 재미 한인사회 최대 자치단체이자 독립운동의 중추기관인 대한인국민회의 지도력은 크게 미치지 않았다.

신한회의 결성

뉴욕의 한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 종결 이전부터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여러 방안을 모색하였다. 1917년 10월 뉴욕에서 결성된 소약국민동맹회가 대전 종결 직후 제2차 대회를 개최하리라는 것과 그 뒤를 이어 파리에 강화회의가 개최될 것이라는 점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 연유로 김헌식은 1918년 11월 12일 북미지방총회장 이대위에게 소약국민동맹회의에 한인 대표자 파견문제를 협의하자고 가장 먼저 제의하였다. 그런데 이대위는 자신이 담당할 일이 아니고 외교를 전담한 중앙총회가 나설 일이라 하고 그의 제안을 무시했다. 그러면서 소약국민동맹회의 파견 과제를 중앙총회장 안창호에게 위임하였다.

대표 파견문제를 협의할 것을 제의했으나 대한인국민회 측에서 별 호응이 없자 김헌식·신성구를 비롯한 18명의 뉴욕 한인들은 독자 활동에 나섰다. 한국 독립을 호소하고 추진할 방편으로 1918년 11월 중순경 신한회(The New Korea Association)를 결성한 것이다. 신한회는 회장 신성구, 서기 조병옥, 외무원 김헌식·이원익으로 구성하였다. 이원익은 1902년 유학을 목적으로 미국에 온 후 비록 성공하진 못했으나 1907년 처음으로 한글 타자기를 발명한 인물이다. 조병옥은 1914년 1월 유학차 미국에 와서 샌프란시스코의 로웰중학교를 다녔고 1918년 펜실베이니아주의 와이오밍세미너리를 졸업한 후 그 해 가을 콜럼비아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한 24세의 젊은 청년이었다.

신한회의 독립청원활동

신한회는 결성 직후부터 독립운동을 위한 의연금 모금활동에 착수하였다. 동년 12월까지 모금한 금액이 약 900달러였다 하니 뉴욕 한인들의 열성은 대단한 것이었다.

신한회는 11월 30일 특별회를 개최하고 만장일치로 12개항의 독립청원서를 채택하였다. 청원서의 주요 내용은 첫째, 한국의 국토가 일본에 강압적으로 병합되어 한국인이 피정복의 인종으로 전락된 것은 부당하고 불법적이다. 둘째, 탐욕 때문에 약한 이웃 나라를 파멸시키는 제국주의는 연합국의 승리로 파괴되었다. 셋째, 미국 정부와 국민 그리고 전쟁에 승리한 연합국은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약소 민족에 대한 민족자결의 대원칙을 지지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강한 이웃 나라인 일본에 의해 축적된 상처와 부정함에 대해 분노를 표현하며, 한국의 현 상황과 한국인의 분노에 대한 간단하고 구체적인 내용을 준비해 이를 미국의 대통령과 상하원 외교위원회, 그리고 파리강화회의 미국 대표단에게 제출한다고 했다.

신한회의 독립청원서는 회장 신성구와 서기 조병옥이 서명한 후 김헌식·신성구·이원익의 이름으로 작성한 12월 2일자 공문에 첨부되었다. 신성구와 김헌식은 12월 3일 이 문서를 미국 상원 외교위원장 로지(Henry C. Lodge)를 만나 전달하려 했다. 그런데 로지는 국무성에 제출할 것과 위원회의 위원 대부분이 이러한 문건을 받아줄 수 없을 것이라는 구실로 접수를 거절하였다. 다시 미 국무부를 찾아갔으나 여기서도 접수를 거절당하자 두 사람은 국무장관으로 파리에서 강화회의 미국대표단을 이끌던 랜싱(Robert Lansing)에게 우송하였다.

독립청원활동에 대한 국제 언론 보도와 확산

미국 정부와 의회를 상대로 신한회가 한국 독립을 호소한 청원서를 전달했다는 사실은 1918년 12월 4일자 연합통신을 통해 즉각 전 세계로 보도되었다. 보도 내용은 “한국은 미국 정부를 향하여 이왕 한미조약을 의지하여 한국의 독립을 보호하며 일본의 통치권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는 것이었다. (“한국 독립 보장 청원 미 정부에 제출”, 『신한민보』 1918년 12월 12일) 『워싱턴 타임스』는 12월 6일자 기사 “Want Demand Made for Independence of Korea”에서 재미 한인들이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 지배하에 있는 한국의 독립을 요청하기 위해 윌슨 대통령과 미 상원 외교위원회에 호소하였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1882년 미국과 한국이 맺은 한미조약을 상기시키고 미국은 도덕적으로 한국의 독립 주권을 보호할 모든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는 한국인의 입장을 보도하였다. 한편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던 일본인 신문 『일미보』는 12월 5일자 기사에서 한인들의 독립청원활동을 경거망동한 짓으로 간주하고 신랄하게 비판 보도하였다.

신한회의 독립 청원활동이 미국 언론에 보도되자 『신한민보』의 편집자 홍언은 1918년 12월 12일자 논설 “일미보의 “한국 독립 제창’을 비평한 것을 논박함”이란 글에서 “마른 하늘에 벽력이 떨어졌다”, “재미 한인의 독립 제창이 워싱톤 연합통신의 전보로부터 세계를 진동하는도다”하고 놀라워했다. 그런 후 재미 한인의 독립청원활동을 비판한 『일미보』의 논조를 2회 연속으로 세세하게 반박하였다. 그는 이번 신한회의 활동을 “8년간 받아온 천고의 대치욕을 씻으려고 일본에 대하여 선전서(선전 포고서)를 걸어놓은 것”으로 높이 평가하였다.

신한회의 독립청원활동은 태평양을 건너 일본의 영자신문과 일본 신문에도 보도되었다. 먼저 The Japan Advertiser는 1918년 12월 15일자 “Koreans Agitate for Independence”에서 미국 정부와 의회에 미주 한인들이 독립청원서를 제출한 사실을 처음으로 보도하였다. 이어서 1919년 1월 18일자에 “Korean Independence”란 제목으로 미국 내 한인 단체가 민족자결권의 원칙을 한국인에게 적용해달라는 결의안을 채택해 윌슨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 미국 대표단, 그리고 미 의회 외교위원회까지 발송하였음을 알렸다. 이 때 한인 단체라 함은 신한회를 의미한다. 신한회의 독립운동 소식이 일본에까지 알려진 것은 그 직후 이승만⋅정한경의 파리행 추진활동 보도와 함께 재일 유학생의 2⋅8독립선언, 나아가 국내 3⋅1운동의 준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신한회는 독립청원활동 외에 1918 12월에 개최한 제2차 소약국민동맹회의 때 대한인국민회와 별도로 독자적으로 한인 대표를 파견했다. 신한회의 한인 대표는 외무원으로 활동한 김헌식으로 그는 소약국민동맹회가 선출한 7인의 집행위원 중 한 사람으로 뽑혀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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