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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불꽃을 점화한 재미 한인의 선구활동


4. 이승만 · 정한경의 파리행 추진과 위임통치 청원

임시 국민대회의 개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파리행 문제 등 중차대한 시국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임시 국민대회를 열었다. 1919년 1월 4일부터 6일까지 3일간 샌프란시스코의 북미지방총회관에서 개최한 국민대회는 그 이름에 걸맞게 북미의 각 지방 대표들이 참가한 1910년대 들어 중앙총회가 소집한 것 중 가장 큰 대회였다. 대회의 진행과 결의 내용은 󰡔신한민보󰡕 1919년 1월 23일자 「호외」로 발행되었다.

임시국민대회는 몇 가지 중요한 사항을 의결하였다. 첫째, 서재필이 제의한 영문 잡지 발간 제의를 검토하고 그 필요성에는 찬동하나 막대한 자본(50만 달러)을 모우기 어렵다는 이유로 부결시켰다. 둘째, 정한경이 저술할 책자 발간 지원비(500달러)를 지원해 주기로 의결했다. 정한경은 이 때의 도움으로 1919년 10월 뉴욕에 있는 출판사(Fleming H. Revell Company)에서 󰡔미국의 동양정책󰡕이란 영문 책자를 발간하였다. 셋째, 1918년 1월에 발생한 하와이 한인사회의 분란을 수습하고 통일시킬 목적으로 안창호를 하와이로 파견하기로 했다. 단순히 파견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전권을 주어서 호놀룰루에 중앙총회 지부까지 조직하는 것도 위임하였다. 넷째, 지방총회나 지방회에서 모금한 의연금을 중앙총회로 보내어 관리하도록 의결했다. 이전 허명에 불과한 중앙총회의 위상을 획기적으로 강화하는 조처였다.

파리행 대표 파견의 추진

하와이에 있던 이승만은 소약국민동맹회의 대표이자 파리행 대표로 선정되었으나 미국 본토행 수속이 늦어져 1919년 1월 15일에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도착 당일 중앙총회 부회장 백일규의 주관으로 이승만 환영회를 성대하게 베풀었는데 이 때 이승만은 제1차 뉴욕 소약국민동맹회의 때 박용만을 대표로 보내고 남은 의연금 1,119달러 50센트를 백일규에게 건네 주었다. 중앙총회의 권위를 인정하겠다는 하와이지방총회의 뜻이 담겨 있었다.

1919년도 중앙총회 임원 선거는 1918년 11월 26일부터 1919년 1월 31일까지 추진되었다. 총회장 후보는 안창호와 황사선이, 부총회장 후보는 박상하, 홍언이 나섰다. 그런데 무슨 사정인지 1919년 2월이 지나도 중앙총회의 임원 선거는 완결되지 못했다. 때문에 중앙총회장 안창호와 부총회장 백일규는 1919년 9월 새 중앙총회장 윤병구가 선출될 때까지 계속 직책을 맡았다. 3・1운동 직후인 4월 1일 원동에서 중대한 일을 추진한다는 목적으로 안창호가 미국을 떠나면서 백일규가 임시대리로 중앙총회장의 임무를 수행했다.

중앙총회는 뉴욕 소약국민동맹회의와 파리강화회의에 대표자 파견을 추진하면서 특별의연금 모금운동을 추진해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파리로 건너갈 기미는 조금도 진척되지 않았다. 한인 대표의 파리행 여권 발급을 미국과 영국이 처음부터 철저히 막고 있었고 여기에 일본 정부의 공작까지 더해 진척이 되고 있지 않았다. 미국 정부는 일본의 내정문제에 간섭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한국의 독립문제에 대해 철저히 외면했다. 때문에 파리강화회의 때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는 패전국의 약소 민족 중 일부에만 적용되었다. 국제 정세는 변하고 있었으나 냉엄한 제국주의적 현실은 그대로였던 것이다.

정한경은 1919년 2월 5일 중앙총회장 안창호에게 보낸 서신에서 파리로 가는 것이 비관적이라고 보고했다. 이에 따라 해결 방안으로 2월 중순 미국에 오는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사정을 호소하는데 전력을 다하기로 했다. 중앙총회는 모처럼 일어난 독립운동의 뜨거운 열기가 파리행의 중단으로 냉각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어떻게든 대표자 파견활동을 계속 추진해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싶었다.

파리행 추진은 성과가 없었으나 이를 추진활동은 미국 언론에 보도되었다. 1918년 11월 27일자 San Francisco Examiner와 12월 25일자 New York Herald는 한인 대표 3인이 파리로 가기 위해 추진 중이라는 사실과 한국인의 독립 청원 활동 간략히 소개하였다. 이러한 보도는 도쿄의 The Japan Advertiser 1월 22일자와 󰡔만조보(萬朝報)󰡕 1919년 1월 18일자와 1월 24일자에 그대로 보도되었다. 이같은 보도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국제정세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던 도쿄의 재일 한국인 유학생들에게 앞서 신한회의 독립청원활동 소식과 함께 큰 자극을 주어 2·8독립선언 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했고 그러한 영향은 국내 3·1운동 준비에도 큰 동력을 제공했다.

위임통치의 청원

이승만과 정한경은 1919년 1월 25일 파리강화회의에서 국제연맹 창설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국제연맹을 통한 독립방안을 모색하였다. 정한경은 그동안 두 차례에 걸쳐 청원서를 보내 한국 독립을 호소했다. 그 하나는 윌슨 대통령에 보낸 청원서(1918.11.25.)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 상원에 보낸 청원서(1918.12.10.)였다. 정한경은 윌슨 대통령에게 보내는 세 번째 청원서(1919.2.25)를 작성해 이승만과 함께 3월 3일 미국 백악관에 보냈다. 그리고 2월 25일 파리에서 귀국한 윌슨 대통령과의 면담을 신청했다. 그런데 면담은 불가능하고 대신 파리에 가 있는 미 국무부 장관 랜싱에게 청원서를 보내라는 회신(3월 7일)을 받았다. 이 때 마지막으로 작성한 청원서는 앞의 두 청원서 내용과 동일한데 단 하나 한국의 독립문제를 국제연맹에 위임해 달라는 내용이 새로 첨가된 것이었다. 후일 이승만・정한경에게 비난이 집중된 ‘위임통치(mandatary)’ 청원이었다.

이승만・정한경이 한국의 독립문제를 국제연맹의 보호 속에 중립국으로 만들고 싶다고 제안한 위임통치 문제는 이미 정한경이 안창호에게 보낸 2월 20일자 편지에서 밝히고 있었다. 또 3월 6일자로 이승만・정한경 두 사람의 이름으로 안창호에게 보낸 서신에서도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 둘 것을 제안했다. 이러한 제안에 대해 백일규는 제3차 임시위원회에 제출해 논의에 부쳤다. 그런데 안창호는 3월 7일자로 정한경에게 보낸 「통첩」에서 “한국 독립을 운동하다가 실패하거든 한국문제를 국제연맹 중에 이부(移付)할 것을 청원”할 것을 지령하였다.

이로 보면 국제연맹 위임통치 청원은 이승만・정한경의 독단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중앙총회와 논의된 것이었다. 그런데 3·1운동 발발해 ‘절대 독립’이 대세가 되면서 위임통치 청원은 설자리를 잃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상하이에서 수립된 임시정부 내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위임통치 청원을 민족의 대의에 반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이를 주장한 이승만과 정한경을 거세게 몰아부쳤다.

저간의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이승만・정한경의 입장에서 보면 여간 억울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중앙총회나 이승만·정한경은 위임통치 청원이 최선은 아니었지만 나름 차선의 외교방책으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이 문제에 관여했던 안창호나 백일규 등 중앙총회의 관계자들은 위임통치의 논란에서 벗어난 대신 이승만과 정한경은 이 일로 큰 오해를 받아 적지 않은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파리행 시도가 막히고 위임통치 청원으로 독립운동의 새 돌파구를 뚫어야 할 어려운 처지에 직면할 때 미주 한인들은 3월 9일 상하이에 있는 현순으로부터 3·1운동 발발 소식을 접했다. 미주 한인사회에 미증유의 독립운동 열기가 분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사진: 한인 대표의 파리행 추진 사실을 보도한 The Japan Advertiser 1919년 1월 22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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