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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발발과 재미 한인의 독립운동 (9)


재미 한인의 선전외교활동

-한국통신부와 한국친우회-

한국통신부의 설립

3·1운동은 각계의 재미 한인들에게 독립운동을 촉발시켰다. 그동안 대한인국민회 중심으로 움직이던 독립운동의 불꽃이 각지의 한인들과 친한 미국인들로 옮아갔다. 필라델피아에서 개최한 ‘제1차 한인회의’는 최초의 국제대회 형태로 열렸고 그 영향은 한국통신부와 한국친우회의 결성으로 파급되었다.

한국통신부는 3·1운동 발발에 크게 감명 받은 필라델피아의 서재필에 의해 설립되었다. 설립 배경은 ‘제1차 한인회의’ 이튿날인 4월 15일 서재필의 제안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일본은 현재 미국에 막강한 통신사를 두고 한국의 실상에 대해 왜곡된 선전을 계속해 오고 있는데 이를 대항하기 위해선 조직적이고 항구적인 선전기관이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당시 일본은 그동안 영문판 연감과 각종 매체 등을 통해 식민통치의 실상을 왜곡하고 있었다. 식민지 한국인이 일본 정치인의 현명한 지도로 현대 문명의 혜택을 받아 행복해 하고 있으며 일본 통치 하에서 번영을 누리고 있다고 선전한 것이다. 서재필은 이러한 일본의 왜곡된 선전활동의 폐해를 깊이 인식하고 한국통신부 설립을 주장하였다.

서재필의 통신부 설립 제안에 대해 3·1운동 후 선전활동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적극 찬성했다. 4월 19일 제20차 위원회의에서 중앙총회는 그를 외교고문으로 임명함과 동시에 필라델피아에 한국통신부 설립을 인준하고 재정지원을 약속했다.

한국통신부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4월 22일 필라델피아에서 활동을 개시했다. 조직은 부장 서재필을 비롯해 서기 박영로, 외교 협찬원(3명: 정한경, 구타펠, 체스터)로 구성했다.

주요 활동

한국통신부의 활동 방향은 서재필이 4월 29일 중앙총회장 대리 백일규에게 밝힌 대로 첫째, 영문 책자 발간을 통한 출판선전활동, 둘째, 대중 집회를 통한 강연활동, 셋째, 미국인들에 의한 친한 단체 결성 지원활동이었다.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영문 책자 발간이다. 오하이오주의 북미대한인학생연맹에서 발간하던 영문 잡지를 인수해 1919년 6월부터 매월 Korea Review(󰡔한국평론󰡕)라는 새 이름으로 미국 전역의 주요 기관과 단체, 학교 등에 배포했다. 그 외 Little Martyrs of Korea(자체 제작), The Renaissance of Korea (Joseph W. Graves), The Renaissance of Korea (Nathaniel Peffer), Independence for Korea(자체 제작) 등을 발간해 배포했다.

한국통신부의 또 다른 활동은 서재필에 의해 추진된 강연활동이다. 서재필의 강연활동은 미국 전역에 걸쳐 시행되었는데 1922년까지 3년여 동안 10만 여명의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약 300회의 강연활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3월 2일 뉴욕시내 타운홀에서 개최한 3·1운동 제2주년 기념식 때는 약 1,3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서재필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이는 미국 동부 지역 한인들이 100여 명도 채 안 되는 상황에서 수많은 미국 사람들이 모인 기념비적인 대회였다.

한국통신부의 활동은 서재필이 Korea Review 1922년 7월호 발행을 끝으로 중단하면서 사실상 종결되었다. 서재필이 독립운동에 뛰어든 후 자신의 개인 사업이 악화된 데다 한국통신부를 유지할 재정 지원조차 원활하지 않자 활동을 중단하였다.

한국친우회의 결성과 활동

한국친우회의 구상은 ‘제1차 한인회의’ 때 서재필이 선전활동의 중요성을 언급하면서 통신부 설립 외에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친한 여론을 일으킬 것을 제안하면서 처음 제기되었다. 그의 제안에 톰킨스((F. W. Tomkins) 목사가 적극 찬성하였는데 그는 밀러 교수, 베네딕트 기자 등과 함께 5월 16일 필라델피아에서 처음으로 한국친우회를 결성하였다. 이를 필두로 한국친우회는 레딩, 포스토리아, 티핀, 핀들레이, 리마, 워싱턴DC, 샌프란시스코 등 미국 전역의 21개 지역에서 결성되었다. 미국 외에 1920년 10월 26일 영국 런던에서, 1921년 5월 20일 프랑스 파리에서도 결성되어 한국친우회는 사실상 국제적인 친한 단체로 발전하였다.

1919년 당시 한국이란 나라가 지구상에 그 존재가 사라져 버린 상황에서 식민지 한국인을 돕기 위해 외국인들이 자발적으로 한국친우회를 결성한 것은 오늘날의 상황에서 볼 때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활동이다. 미국인을 비롯해 영국인과 프랑스인들이 한국친우회를 결성한 것은 3·1운동으로 제기된 자유를 향한 한국인의 독립 열망을 지지한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인 독립 열망을 무자비하게 짓밟고 있는 일본 정부의 만행을 순수한 기독교 정신에서 항거하고 동정·지원하기 위함이었다.

한국친우회가 미국 각지와 유럽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서재필을 비롯해 이승만과 정한경, 각 지역 한인 유학생들의 노력이 있어서 가능했다. 그리고 헐버트, 벡, 화이팅 목사 등 일찍이 한국에서 활동한 바 있는 재한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활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친우회의 활동은 미국 언론에 친한 여론을 불러일으켰고 나아가 미국 의회까지 영향을 끼쳤다. 이 가운데 필라델피아에서 처음으로 한국친우회를 결성하고 회장으로 활동한 톰킨스 목사는 1921년 11월에 개최된 워싱턴군축회의 때 한국대표단의 외교활동을 적극 도와주었다. 또한 그는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때 발생한 한인 대학살 문제를 미 국무장관 휴즈에게 공식으로 제기해 미국 정부를 움직이도록 하였다.

한국친우회의 활동은 1922년을 고비로 점차 쇠퇴하다 1923년 말경 사라진다. 3·1운동이 가진 선전 재료로서의 가치가 점차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많은 대중집회를 통해 순순하게 외국인(주로 미국인)들로만 구성된 한국친우회의 결성은 국제적인 도움이 절실했던 한국인의 입장에서 천군만마와 같은 존재였다. 독립을 향한 한국인의 열망을 지지해 주고 한민족의 핍박과 고통을 마음으로 동정하고 지원해 준 한국친우회의 활동은 재미 한인들은 물론 모든 한국인들이 쉽게 잊어서는 안 될 고마운 기억으로 오랫동안 간직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사진1: 필라델피아 한국통신부에서 월간으로 발행한 Korea Review

사진2: 미조리주 캔사스시티 한국친우회 결성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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